과거가 미래가 되다

by 걷고

며칠 전 서대문구 KT 화재가 발생했다. 그날 우리는 첫눈을 맞이했고 서너 명의 길동무들과 월드컵 공원, 하늘 공원, 노을 공원을 걸었다. 불광천에는 빨간 단풍나무와 흰 눈이 조화롭게 어울리며 가을이며 동시에 겨울을 알려주고 있었다. 월드컵 공원의 들판에는 사람들이 아이들과 애견을 데리고 나와 눈 속에서 같이 즐겁게 뛰어놀고 있었다. 그런 활기차고 평화로운 모습이 설경과 어울려 행복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하늘공원에서 바라본 월드컵 경기장과 월드컵 공원의 모습이 보기 좋았고, 하늘 공원의 억새풀은 눈과 어울리며 멋진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공원에서 바라본 한강의 윤슬이 아름다웠다. 길동무 한 분이 ‘윤슬’이라는 단어를 알려주었다. 사전을 찾아보았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하는 단어이다. 노을공원에 있는 캠핑장은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고, 사람들의 발자국조차 없는 구릉은 마치 설산에 들어온 느낌을 주었다.

세상의 온갖 시끄럽고 추잡한 모습을 눈이 덮어 주었다. 번잡함은 눈(雪)으로 인해 차분함 속으로 묻혔고, 땅 위의 온갖 오물들은 눈(雪)으로 정화시켜 주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 역시 저절로 정화가 되었다. 자연은 이렇게 자연스러운 자연의 이치와 모습으로 우리에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기도 하며, 자정(自淨)의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눈으로 덮여있는 길을 걸으며 저절로 마음이 고요해지고 편해졌다.

길동무들과 식사 후 커피숍에 들렸다. 계산을 하려는데 카드로 결제를 할 수 없고 현금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KT 화재의 여파이다. 통신사의 화재가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적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현금을 내고, 거스름돈을 건네받고, 종업원은 노트에 매출 내용을 기입하고 있었다. 예전의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하나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정감이 간다. 카드 결제로 전표를 받는 것이 아니고 현금을 주고받으며 서로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하는 모습이 정겹다.

집에 들어오니 TV가 안 켜지고, 와이파이가 안 된다고 아내가 얘기했다. TV가 들어오지 않자 할 일이 별로 없고 괜히 심심해졌다. 아내는 거실에 누워 잡지를 보고 있고, 나는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갑자기 집안이 너무나 조용한 절간이 되었다. 그런 조용함이 편하면서도 어색하기도 했다. TV가 없고 휴대전화도 사용하지 않으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얘기도 하고, 각자 할 일을 하고, 음악도 듣고, 서로 바라보며 웃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한 가정의 모습이다. 결국 일찍 잠을 잤고, 덕분에 다음 날 아침에 몸이 개운했다. 과거의 일상 속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약 열흘 정도 지방에 다녀온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안부 인사차 전화를 드렸다. 그분과 함께 하는 모임에서 내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였다. 카톡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데이터를 사용하여 카톡을 열어보니 모임 약속을 하려는데 나만 연락이 되지 않아 단독 방에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였다. 카톡이나 문자로 연락하는 것도 좋지만, 전화 통화가 주는 따뜻함과 친근함이 좋다. 덕분에 전화 통화의 고마움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모여서 자연인으로 열흘 정도 절에서 살다 온 선배의 얘기를 듣고 흠뻑 취했다.

한 통신사의 화재로 인해 많은 분들께서 불편을 겪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런 불편함이 오히려 과거로 돌아가게 만들어 주며 바쁘게 돌아가던 일상에서 멈춤의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아마 이런 불편함은 우리에게 앞으로 자주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미래의 세상에서 우리는 과거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잊고 있었던 추억과 정감을 되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TV, 휴대전화, 인터넷, 전기 등 모든 현대 문명과 과학의 창조물들을 사용할 수 없는 자연친화적인 호텔이 외국에 있다고 들었다. 그런 호텔이 생겼다는 것은 그만한 수요가 있고, 그럴 필요성이 있다는 것의 반증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인간성을 회복하고 좀 더 온전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가 과거로 돌아가는 순환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점점 더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 불편을 겪으신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각자 스스로 이런 기회를 만들어 일상 속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연습을 하는 것도 자신의 원래 모습을 찾아가는 좋은 과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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