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주변 공원을 걷는데 하늘이 청명하다.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하늘과 웅덩이에 비친 하늘과 나무의 모습이 잘 어울린다. 나무는 실물이고 그림자는 허상이다. 하늘은 실물이고, 웅덩이에 비친 하늘은 허상이다. 물론 실물도 단지 우리 눈에 실물처럼 보일 뿐이다. 비친 허상을 보며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이라는 금강경 경구가 떠오른다.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은 꿈(夢), 환상(幻), 물거품(泡), 그림자(影)와 같다는 실체 없음과 덧없음을 설파하는 불교 핵심 사상 중 하나이다.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자연의 법칙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 정작 마음과 행동은 다르게 행동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추구하는 욕망으로는 권력, 명예, 사랑, 부귀 등이 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런 허상 같은 욕망에서 벗어나 수행자가 되거나 아니면 모든 욕심을 버리고 매일 소풍 가는 마음으로 한가롭고 여유롭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불교적 환몽설화인 ‘조신의 꿈’이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조신은 승려로 태수의 딸을 한번 보고는 흠모하여 관세음보살에게 인연을 맺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한다. 꿈속에서 그 여인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지만, 가난과 고통, 자식의 죽음 등 비극적인 삶을 살아간다. 결국 부부는 헤어지기로 결정하고, 이별의 순간 꿈에서 깨어난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모든 욕망과 꿈 역시 ‘조신의 꿈’과 다르지 않다. 욕망은 그 자체로 위험하지는 않다. 욕망은 잘 활용하면 삶의 동력이 되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방편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기보다는 욕망을 추구하고 이루기 위해 평생을 바친다. 때로는 헛된 꿈을 좇아 한평생 낭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무엇을 하면 행복한지? 참다운 행복이란 무엇인지? 자신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질 새도 없이 꿈 세상을 살아가며 어느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참 허무한 인생이다.
비록 인연 따라 생멸한다는 법칙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더라도, 일상 속에서 ‘조신의 꿈’에서 벗어나 좀 더 생생하고 참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매일 같은 생활 태도로 살아가며 자신이 변화하기를 원하는 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모래로 밥을 지을 수 없듯이, 스스로 변화 없이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리라고 기대하거나 꿈을 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 변화가 이루어질 때 조금씩 자신이 원하는 삶과 가까워지며 참 자기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걷기 학교를 운영하고, 글쓰기를 하며, 거의 매일 걷고 있다. 아침마다 명상을 하지만 가끔 못 할 때도 있다. 걷기와 글쓰기는 ‘조신의 꿈’에서 깨어나 내가 되어가는 과정이다. 길을 걸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글쓰기를 하며 마음을 정돈한다. 비록 그 글이 사회적으로 또는 가정적으로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이며, 비창조적인 것일지라도 나 자신에게는 의미 있는 일이다. 누군가의 뜻에 따라 살아갈 때는 지났다. 나 스스로 나답게 살아가면 된다. 그 방편이 바로 걷기와 글쓰기다. 그리고 명상은 마음 정원을 관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비록 죽을 때까지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성공을 이룬 것이 없더라도, 죽을 때까지 이 일을 이어간다면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삶이 된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것은 나의 꿈인가? 아니면 나의 삶인가? 나는 꿈을 좇는 조신이 되고 싶지 않고 나의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내가 걷고, 글 쓰고, 명상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