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050]

농막

by 걷고


일시: 2020년 4월 19일 (당고개역 – 덕릉고개 - 화랑대역 11km)

누적거리: 769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걷기에 아주 좋은 날입니다. 아침에 햇빛이 나기도 하고, 바람이 불기도 하고, 날씨가 흐려지기도 합니다. 곡우라서 그런지 비 소식이 있습니다. 절기에 대한 정확성과 그 의미는 농사를 주업으로 삼는 우리들에게 매우 소중한 선조의 지혜입니다. 곡우에 비가 오면 풍년이 든다고 합니다. 모두 코로나로 삶이 힘든데, 그나마 곡우에 비 소식이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 부디 풍년이 되고, 코로나는 물러가고, 코로나로 인한 사회 변화에 우리 모두 적응하고, 코로나가 저주가 아닌 축복이 되길 바랍니다. 특히 의료진들의 희생적인 봉사와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며 주변 사람들을 위한 자가 격리를 지키신 분들, 자영업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신 모든 분들께 감사와 응원을 보냅니다.


홀로 서울 둘레길을 걷고 있습니다. 홀로 걸으며 길과 점점 더 친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느낌이 좋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왜 걷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습니다. “제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 걷기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걸으면 마음이 즐겁고 저절로 노래가 나오기도 합니다. 길과 친해지는 느낌도 좋습니다.” 돌이켜보니 군대 생활도 행군을 잘해서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말년에 100km 행군도 거뜬하게 해냈습니다. 산티아고 길을 걸을 때,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길을 걸으면서도 발바닥에 물집 한 점 잡힌 적이 없습니다. 저는 마치 걷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 같습니다.

저는 정말로 걷기를 잘하고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제 재능입니다. 그 재능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라는 소명을 명 받은 사람입니다. 걷기를 통한 봉사를 하며 살아갈 사람이라는 것을, 그것이 제가 이 세상에 온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걷기 관련 책도 쓰고, 많은 길을 걸으며 길 속에서 배우고, 나중에 걷기 학교를 만들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평생 하며, 일이 놀이가 되고, 놀이가 봉사가 되고, 놀이가 사람들과 소통하는 장(場)이 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제 재능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일단 알게 되니 점점 더 그 재능의 소중함을 느끼고 잘 활용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그런 의무감이 저를 속박하거나 부담스럽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냥 걸으면 됩니다. 걸으면 할 일이 더욱 명백하게 드러나고,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며,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샘솟듯 나오기도 합니다.


홀로 걸으며 아내가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는 재미도 아주 기가 막힙니다. 아내는 김밥을 싸줍니다. 그리고 토마토, 피망, 사과, 오렌지 등 과일과 야채를 한 통 준비해 줍니다. 뜨거운 물과 커피 잔, 일회용 커피도 준비해 줍니다. 매번 걸을 때마다 정성스럽게 싸줍니다.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두 시간 정도 걸은 후에 적당한 곳에 자리 잡아 음식을 펴 놓으면 진수성찬이 따로 없습니다. 눈앞에 펼쳐진 탁 트인 자연의 모습을 바라보며 음식을 먹는 재미는 걸으며 즐기는 저만의 소박한 사치입니다. 맛있는 음식, 차 한잔 마시는 한가로움, 자연을 바라보는 여유로움이 삶에 활력과 풍요로움을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길 마칠 때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생각나서 근처에 사시는 선배님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흔쾌히 오라고 하셔서 한 걸음에 달려갔습니다. 40년 이상 알고 지내 온 선배로 서로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 기간 동안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서로 불편한 일도 있었고, 좋았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슬기롭게 잘 지나왔기에 이제는 그저 그러려니 하며 지냅니다. 세월이 준 선물입니다. 또한 그런 과정을 통해서 각자 조금씩 성숙해지기도 합니다. 그 선배는 근처에 사시는 분들에게 연락을 해서 네 명이 자리를 했습니다. 선배를 제외한 두 분은 가끔 함께 만나는 좋은 친구분들입니다. 그분들은 같은 동네에 살고 있어서 가끔 모이는데 저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입니다. 마음공부 얘기도 하고, 서로 힘든 얘기도 하고, 서로 도움을 주기도 하는 좋은 친구들입니다. 나이 들어서 이런 친구 모임이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하고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그중 한 친구가 원주에 농막을 준비하고 있다고 해서 모두 신이 났습니다. 6평의 농막을 이층으로 꾸며서 입주 축하 합숙 훈련(?)을 하기로 했습니다. 아직 땅 계약을 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는 이미 농막을 지어놓고 그 안에 모여서 놀고 있었습니다. 단식도 하고, 참선도 하고, 와인도 마시고, 고기도 구워 먹고, 주변 계곡에서 물놀이도 하는 등,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습니다. 한 분은 자신이 관리인이 되겠다고 하여 서로 경쟁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또는 홀로 만의 시간을 온전히 쓸 수 있는 이런 공간이 필요합니다. 가족과 사회로부터 벗어나, 모든 사회적인 관계로부터 벗어나, 도심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는 이런 시간이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고독의 시간을 통해 성찰을 하게 되고, 그런 성찰을 사회에 돌려주는 일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선배는 이 농막을 SHV로 명명하였습니다. Self Healing Village, 자기 치유 공간입니다. 힐링은 자신만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된 존재이기에 나 자신의 힐링은 모든 존재의 힐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60년 이상 살아오면서 많은 일들을 겪었고, 큰일 없이 살고 있습니다. 잘 살아오셨습니다. 정말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 기간을 견뎌오면서 많은 꿈을 꾼 적도 있었을 것이고, 좌절과 실망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을 겁니다. 농막을 만들겠다는 분은 30년 전부터 이런 공간을 갖고 싶어 했다고 합니다. 맞벌이 부부로 30년 이상 근무하며 아이 셋을 키운 엄마의 삶은 너무나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근무할 거면 집에 가라’는 말을 상사로부터 많이 들었다고 합니다. 특히나 아이들이 아플 때 병원에 같이 가지 못한 것이 지금도 마음 아프다고 합니다. 그런 분이기에 마음속으로 자신만의 공간이 더욱더 필요했을 겁니다. 그런 분이 농막을 짓기 위해 모레 땅을 계약하러 간다고 하니 덩달아 신이 납니다. 마치 제 일처럼 신이 났습니다. 지나 온 상처를 치유하고 앞으로 행복한 삶을 꾸려 나가길 바랄 뿐입니다. 모든 책임과 의무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자신만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길 응원합니다. 농막에서 입주 파티를 할 날이 기다려집니다. 마음이 벌써 설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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