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의 걷기 일기 0097]

소나기

by 걷고

코스: 20200730 -20200801 서울 둘레길 답사 외 26km

누적거리:1,482km

평균 속도: 3.8km/h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오랜만에 비를 맞으며 즐겁게 걸었다. 늘 빗속을 뚫고 걸어보고 싶었다. 서울 둘레길 일부 구간인 수서역에서 양재 시민이 숲까지 약 4시간에 걸쳐 걸었다. 비 소식이 있었지만, 출발할 때는 비가 그치고 무덥기만 했다. 처음부터 계단 길을 오르며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전 날 술을 마셔서 그런지 발 움직임이 많이 무겁게 느껴진다. 날씨는 오히려 개는 듯 구름이 사라지고 간혹 해가 얼굴을 내밀며 숲 속을 따뜻하게 말려주고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아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산속에는 전날 내렸던 비로 인해 나무가 쓰러지고 좁은 길 측면의 산 일부가 유실되어 길 자체가 위험하게 버티고 서 있다. 길에 산만하게 흩어진 나뭇잎들은 전날 비바람의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조금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방수 점퍼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벼운 비 정도는 가려줄 수 있는 점퍼를 입었다. 우의는 비를 막아주기는 하지만, 우비 안이 너무 더워 가뜩이나 무더운 날씨에 찜통이 될 수도 있어서 점퍼를 입었다. 오히려 움직임이 가볍다. 산에서 맞이하는 빗소리는 도시에서 듣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나뭇잎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그 소리가 주는 효과음이 크고 다양해서 마치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는 것 같다. 바람이 불면서 숲과 어울리며 내는 소리는 장엄하다. 마치 계곡물이 흐르며 힘찬 물소리를 내는 것처럼 들린다. 산속에서 듣는 빗소리는 훨씬 더 풍부하고 현장감이 있고 긴장감을 줄 정도로 강렬하다. 아마 빗속을 걷는 사람들에게 안전에 신경 쓰라는 자연의 배려일 것이다. 그런 소리가 반갑다.

중간에 쉬면서 준비해 온 음식을 먹었다. 아내가 싸 준 샌드위치와 두유를 두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한 친구는 캔 맥주를 큰 아이스박스에서 꺼내어 주었다. 그 캔 맥주를 만지는 순간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만으로 무더위를 한 번에 날려주기에 충분했다. 세 명은 건배를 하며 시원하게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의 목 넘김이 무더위 속을 걸었던 우리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주었다. 땀 흘린 만큼 맥주의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지난번에는 시원한 수박을 들고 온 친구가 이번에는 차가운 맥주로 우리에게 기분 좋은 선물을 해 주었다. 다음에는 무엇으로 기쁜 선물을 준비해 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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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가 거세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쓰러진 나무가 길을 막고 서있어서 조심스럽게 넘어가기도 했다. 길 위의 돌이 미끄럽고 진흙으로 인해 걷기가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이런 날 이런 길을 걷는 기쁨이 불편함보다 훨씬 크다. 대모산과 구룡산을 넘어 도로에 도착하자 빗줄기가 더욱 거세졌다. 양재천에 들어서자 비가 더 심하게 내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맞이하는 큰 비를 맞으며 기분 좋은 발걸음을 옮겼다. 빗속을 걸으며 무슨 생각, 어떤 사람이 떠오르냐고 서로에게 물었다. 갑자기 산티아고 메세타 평원이 떠올랐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워낙 비를 많이 맞았던 나는 그 이후로 빗속 걷기를 오히려 즐길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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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메세타 평원을 걸으며 온몸이 비에 젖고, 등산화는 밑창이 떨어져 힘들게 걷다가 우연히 들렸던 성당에서의 하룻밤은 순례길에서 만난 가장 강렬한 기억이었고, 가장 큰 가르침을 받은 날이다. 그날은 비가 엄청나게 쏟아져 모두 일찍 알베르게에 들어간 덕분에 머물 숙소가 없어서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날 하루 10시간 넘게 41km 정도 걸었다. 운 좋게 알베르게처럼 순례자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는 성당을 만난 것은 천운이었다. 마치 오래된 운명이 정해놓은 만남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성당에서 성자들을 만나기 위해 다른 알베르게에서는 나를 맞이하지 않았던 것 같다.

전기 시설은 없고 태양광을 이용해서 따뜻한 물로 간단한 샤워만 가능했다. 저녁에는 촛불을 켜놓고 멋진 만찬을 먹을 수 있었다. 천상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를 들을 수 있었고, 포도주에 취해 나는 단상에 올라가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다. 음식과 모든 준비를 조용히 그리고 너무나 친절하게 해 주시는 세 분의 성자들 기억이 떠오르며 잠시 감사한 먹먹함이 몰려오기도 했다. 세족식도 그날 생전 처음으로 받아봤다. 앞으로도 그런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분들을 통해 '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진리를 배울 수 있었다. 갑자기 달려가서 그분들을 만나고 싶다. 그날의 경험이 전체 일정의 클라이맥스였고, 그다음부터는 편안하게 또 즐겁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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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속 걷기를 좋아하게 된 계기가 아마 그날의 아름다운 경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날 길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빗줄기 속을 홀로 걸으며 천둥과 번개가 주는 두려움을 견뎌내야만 했다. 명상도 해 보았고, 다른 생각으로 전환하려고 했지만, 두려움을 덜어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두려움의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었다. 비, 천둥, 번개가 직접적으로 나를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길을 넓고 800m 정도의 고도에 위치한 메세타 평원이 물속에 잠길 리는 만무하다. 두려움은 그들로 인한 마음속에서 저절로 떠오르는 마음의 장난이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특히나, 천둥과 번개가 주는 두려움의 원인이 뭔지 궁금했다. 순례를 마친 후에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로 비에 대한 두려움은 말끔히 사라졌다.

어제 빗속을 걸으며 메세타 평원의 추억을 잠시나마 돌아볼 수 있었다. 또 왜 빗속 걷기를 좋아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뉴스에서는 도림천에 갑자기 물이 불어서 인명 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그분의 명복을 기원한다. 비를 즐겁게 맞으며 걸었던 내가 그분에게 괜한 죄송스러운 마음이 잠시 들었다. 비로 인해 나처럼 즐거움을 느낀 사람보다는 힘든 일을 겪는 분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분들이 모두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길 마음 모아 기도한다.

같이 걸었던 친구가 시를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역시 멋지고 감성이 풍부한 친구다. 그 시가 어제의 소나기를 또 빗속 걷기를 좋아하는 나를 충분히 잘 표현해 주었다. 함께 걸었던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더럭 더럭 운다. 8월 소나기.

늙은 부처가 낮잠을 깬다.

숲 속 어디에 반짝이는 것이 있다.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틀림없다. (김영배 8월 소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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