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과 심리치료의 만남

(Arnold Mindell 저/ 정인석 역)

by 걷고

명상을 오랫동안 수행하는 척해왔지만, 게으르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해 힘든 상황에서 별 도움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나마 엉터리라도 꾸준히 공부를 해 온 덕분에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할 만한 수준이 되지는 못했지만,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는 자그마한 힘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앉아있는 그 순간 만이라도 상황에 끌려다니지 않으려고 애쓴 덕을 본 것이다. 비록 1분 명상하며 55초간 잡념에 빠져 있어도 최소한 5초 정도는 끌려다니지 않으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 5초간의 짧은 순간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상황에 끌려다니는 순간이 줄어든다. 상황에 끌려다니지 않으면 상황을 바로 볼 수 있는 시각을 되찾을 수 있다.

심리 상담이 심리적으로 어려운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병이 나면 병원에 가서 진단받고 약을 처방받듯이, 심리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심리 상담을 통해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병원에 간다고 모든 병이 다 낫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 그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도 없다. 심리 상담 역시 마찬가지다. 한번 상담을 받는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극복하고 사회생활을 하며 다시 힘든 일이 있으면 찾아가 도움을 받는 것이다.

명상과 심리 상담 두 가지 모두 사람들의 행복과 평안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평생 행복할 수만 있다면 이 두 가지는 아무 쓸모가 없다. 이 두 가지는 우리의 삶 자체가 갈등과 번민, 고통을 내포하고 있기에 필요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이다. 세대가 바뀌면서 고통의 내용과 강도가 달라짐에 따라 이 두 가지 역시 그 추세에 맞춰 변화를 하고 기법이 다양화되고 있다. 원인이 달라지면 그에 따른 결과도 달라지고, 처방도 달라지게 된다. 이 두 가지에 걷기를 접목한 프로그램을 오랜 기간 구상해 오고 있다. 관련 서적을 보기도 하고, 걷기를 통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도하기도 하며 조금씩 정리해 가고 있다. 이제 어느 정도 손에 잡히는 느낌이 든다. 천천히 시도하고, 수정과 보완하며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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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명상과 심리치료의 만남’이라는 책을 읽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동양의 명상과 서양의 심리치료 사이에 공통분모가 있을 것이다. 대학원에서 불교상담을 전공했지만, 이 두 가지를 접목한 이론이 아직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동양의 명상은 ‘무아’를 체득하는 것이 중요하다. 서양에서는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 두 가지는 양립될 수 없는데, 틀림없이 어떤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심리학자들이 불교 명상 공부를 수행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들 역시 명상과 심리치료를 접목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내용 중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나름대로 해석해서 정리해 본다.

저자는 ‘하는 나’, ‘느끼는 나’, 그리고 ‘관찰자인 나’인 세 가지의 ‘나’가 있다고 한다. ‘하는 나’가 만족하면 명상이나 심리치료의 필요성은 없어진다. 하지만 만족을 느끼기에는 우리의 욕심이 너무 많다. ‘느끼는 나’는 감각과 내부 수용 감각을 통해 지각하는 ‘나’이다. 감각은 촉각, 시각, 미각, 후각, 청각 등이고, 내부 수용 감각은 체온, 긴장감, 혈압, 고통 등이다. ‘하는 나’가 외부 자극을 통해 반응하는 ‘느끼는 나’가 된다. ‘관찰자인 나’는 이 둘을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공평한 관찰자다. 저자는 이를 ‘지각에 공감적인 자각 (compassionate awareness)을 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자각만 하는 것이지, 판단이나 비난, 시비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편안해지기 위해서는 이 ‘관찰자인 나’의 힘을 키워야 한다. 상황을 주관적으로 바로 보거나,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보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을 키워야 한다. 불교에서는 이를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 한다. 여실지견을 보는 눈이 바로 정견(正見)이다. 이 정견이 바로 ‘관찰자인 나’다.

저자는 자기가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에지(edge)라고 표현하며, 이 에지는 ‘객관적이 사실에 대응하지 않고 신념(belief)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신념이란 과거의 경험이나 주관적인 해석 등에 의해 만들어진 그릇된 신념을 뜻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변화는 에지의 확장’이라고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확장이라는 표현보다는 변환이라는 표현을 쓰고 싶다. 에지를 알아차리면 에지에 빠지지 않게 된다. 사견(邪見)에서 정견(正見)으로 시각이 변환되는 것이다. 한계를 느끼기 위해서는 한계까지 가 봐야 알 수 있다. 한계까지 가 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한계를 알거나 느낄 수가 없다. 한계까지 가 본 사람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힘을 낼 수 있는 용기를 갖고 결국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 간다. 물론 한계까지 굳이 갈 필요도 없이 하루하루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최상의 삶이 될 것이다. ‘에지’를 극복하고 알아차리는 것 역시 ‘관찰자인 나’의 역할이다. ‘에지’라는 용어를 들으며 나의 에지는 무엇인지 잠시 고민해 보기도 했다. 평온한 삶을 위해서 에지의 변환은 반드시 필요하다.

저자는 ‘대인 관계를 통해서 자신을 알게 된다.’라고 했다. 타인을 자신의 거울로 삼아 자신을 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고민을 만들어 내는 가해자에게 피해를 당한다.’고 했다. 고민을 만들어 내는 것도 ‘자신’이며, 피해를 입는 것도 ‘자신’이다.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자신’이라는 얘기다. 여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동일시에서 벗어나 관찰자가 되어야 된다고 했다. 시청자가 TV 드라마를 보며 감정 이입이 되는 것이 바로 자기 동일시다. 우리는 시청자가 되기만 하면 된다. 그냥 바라보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관찰자가 되는 방법이 대인 관계의 어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미지 속의 인물은 당신의 일부다’리고 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타인의 모습은 결국 자신의 모습이 상대방에게 투영되어 보이는 자기 이미지다. 이것이 바로 투사(投射)다.

이 책의 요지는 결국 평온한 삶을 위해서 ‘관찰자인 나’를 키우라는 것이다. 명상은 바로 ‘관찰자인 나’를 키우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명상의 방법과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명상의 정의는 ‘지금-여기. 몸 있는 곳에 마음을 두며, 하고 있는 일을 자각하며 하는 것’이다. 아직 공부가 깊지 않아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다. 지금까지 내가 경험하고 공부해온 바로는 이것이 명상의 원칙이고, 정의고, 원리라고 생각한다.

“명상은 감각 입력 데이터 하나하나를 모아 ‘의미 있는 자기’라는 거대 구조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내려놓고 마음이 쉴 수 있도록 피난처를 제공한다. 제대로 된 알아차림의 수행 안에서 우리는 의식의 에피소드 하나하나를 강력하게 알아차리지만, 그 즉시 그것들을 놓아 버리고 다음 순간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그 어떤 것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통과해 간다.

명상은 떠오르는 것은 그것이 생각이든, 감정이든, 기억이든 인지하되 그냥 지나가게 내버려 둔다. 떠오르는 것들에 주의를 집중하되 자애로운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매달리지도 물리치지도 않으며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지나가도록 지켜본다.” (프로이트의 의자와 붓다의 방석/액설 호퍼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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