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한 방울
날짜와 거리: 20210103 12km
코스: 불광천 – 한강변 – 노을공원 – 메타세쿼이아 길 – 문화비축기지 – 불광천
누적거리: 2,904km
기록 시작일: 2019년 11월 20일
오전에 처갓집에 들려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집에 오니 오후 4시경이 되었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걸으러 나왔다. 불광천에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지만, 노을공원 주변 길에 들어서자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여유롭고 한가롭게 걸을 수 있었다. 어둠이 깔린 길을 홀로 걷는 차분함이 좋다. 며칠 전 신문에서 읽었던 이어령 선생님의 ‘눈물 한 방울’이 떠올랐다.
“햇볕 내리쬐는 가을날, 노인은 집 뜨락에 날아든 참새를 보았다. 어릴 적 동네 개구쟁이들과 쇠꼬챙이로 꿰어 구워 먹던 참새였다. 이 작은 생명을, 한 폭의 ‘날아다니는 수묵화’와도 같은 저 어여쁜 새를 뜨거운 불에 구워 먹었다니…… 종종걸음 치는 새를 눈길로 쫓던 노인은 종이에 연필로 참새를 그렸다. 그리고 썼다. ‘시든 잔디밭, 날아든 참새를 보고, 눈물 한 방울.” (이어령)
췌장암을 앓고 있는 이어령 선생님의 글이다. 한국 지성의 대표적 인물이 스러져가는 몸을 느끼며 모든 생명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눈물 한 방울’로 살아온 삶에 대한 참회와 뭇 생명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사람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행복한 일이다. 평생 공부와 지성인의 삶을 살아온 분의 삶 역시 인간이기에 많은 회한이 있나 보다. 어떤 위치에 있든지, 어떤 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든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든지, 어떤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든 지,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하지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차이점은 분명히 있다. 눈물은 양심의 소리이고, 영혼의 울림이고, 너와 나의 벽을 넘어서는 무경계의 표현이다. 며칠 전 신문에 실린 이어령 선생님의 글을 보고 ‘눈물 한 방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TV를 보거나, 신문을 읽거나, 남의 얘기를 듣거나, 영화를 보거나 아니면 책을 읽으면서 혼자 눈물을 훔치는 경우가 잦아졌다. 특히 힘든 일을 극복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으며 더욱 눈물이 난다. 그들의 삶이 나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기에 감정이입이 되어서 눈물이 나는 것 같다. 돌아보면 우리네 삶은 대동소이하다. 모든 권력과 부를 지닌 자도, 겉으로 보기에 부럽기만 한 자도, 아니면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도 또 저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느껴지는 자의 삶 속에도 희비가 있다. 자신만의 입장을 생각하며 자신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삶을 잠시 돌아보면 그들 역시 힘들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고통이 삶의 보편성이라는 것이 주는 위안이 있다.
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와 함께 산 지 벌써 36년이 되었다. 아내에게 못되게 굴었던 일도 떠오르고, 쓸데없이 소리쳤던 일도 떠오른다. 아내는 묵묵히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 덕분에 조금씩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죽음을 잠시 생각했다. 내가 먼저 죽든, 아내가 먼저 죽든,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아내를 생각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그간 저질렀던 실수와 잘못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다. 동시에 앞으로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거나, 아내가 눈물을 흘리게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의 눈물이다.
어느새 흰머리와 주름이 잡힌 아내를 보며 눈물 한 방울
참회와 용서를 구하며 눈물 한 방울
죽을 때 아내에게 후회할 일 만들지 않겠다며 눈물 한 방울
문화비축기지에 들어가니 새로운 조형물이 전시되어있다. 수많은 물고기들이 마치 수족관에서 유영하듯 자유롭게 떠다닌다. 회로 먹고, 튀겨 먹고, 탕으로 만들어 먹었던 물고기를 보며 ‘눈물 한 방울’.
‘눈물 한 방울’의 힘은 참 위대하다. 어떤 종교보다도 더 위대하다. 눈물 한 방울이 모든 삶의 고통을 씻어주고, 회한을 닦아 주며, 부족한 사랑을 채워준다. ‘눈물 한 방울’의 힘을 알려주신 이어령 선생님의 평안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