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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이런 짓을!

by 걷고

미니버스를 타고 오늘 출발지점인 장남교로 향한다. 장남교는 연천과 적성을 연결해 주는 다리다. 장남교는 그간 걸었던 경기 둘레길 10개 코스 중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교각 이름이다. 지난주 8코스 종료지점인 장남교를 넘기 바로 직전부터 내리는 비를 매우 기쁘게 맞이했다. 비 내리기 전까지의 무더위와 지열이 우리를 너무 괴롭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폭우로 변한 비는 시야를 가릴 정도로 쏟아졌고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걸었다. 장남교를 건널 때 폭우는 절정을 이루었고, 우리 모두 물에 빠진 생쥐가 되었다. 버스도 오지 않고, 택시를 불러도 오지 않아서 결국 다시 장남교를 넘어 황토돛배 나루에서 버스를 타고 무사히 귀경할 수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짧은 순간에 천당과 지옥을 맛볼 수 있었다. 그 장남교를 오늘은 시원한 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건너가며 그날의 우왕좌왕한 모습을 떠올라 헛웃음을 짓는다. 차창 밖의 길과 풍경을 보며 우리가 걸어왔던 족적을 확인한다. 개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의 냄새를 바탕으로 지나 온 길을 되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저 길도 우리가 걸었고, 저 표지판도 기억나고, 저 식당도 기억난다. 차를 타며 지나가는 길은 눈에 익숙하지 않지만, 몸으로 직접 걸은 길은 길 모습만으로도 걸었던 길임을 알 수 있다. 비슷하게 생긴 길도 나름대로 특징이 있다. 자신의 발로 직접 걸은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다. 눈으로 본 것과 몸으로 체험한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장남교 건너서 내린 후 스탬프 함으로 가서 지난번에 찍지 못한 스탬프를 찍었다. 지난번에도 스탬프잉크가 부족해서 찍을 수가 없었는데, 아직도 보충되지 않았다. 관계자 분께서 빠른 조치를 해 주시면 좋을 텐데 아쉽다. 길동무인 꽃가루님께서 이런 일을 예상하고 스탬프를 들고 오셔서 우리끼리 기분 좋게 웃으며 찍고 출발할 수 있었다. 걷기 전 부상 예방을 위해 간단한 몸 풀기 스트레칭을 한다. 걷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건강을 위해 걷는 것은 공통적일 것이다. 앞으로도 걷기 전 스트레칭은 계속 진행할 계획이다. 드디어 걷기 시작한다. 기분 좋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햇빛은 강하지만 가끔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은 계절의 변화를 예고한다. 올여름은 무더위와 강렬한 햇빛, 뜨거운 지열, 소나기 등 온갖 자연환경과 날씨를 회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걸었다.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더위를 극복하고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는 멋진 여름을 보내고 있다.


사미천을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가 보인다. 장마철에는 위험해서 우회해서 걸으라는 표지판이 있다. 빗물이 빠져 징검다리 주변에는 갯벌이 형성되어 있었고, 징검다리 위로 물이 흐르고 있다. 유속이 빨라 보인다. 히란야님과 나는 일단 신발과 양말을 벗고 징검다리 한두 개를 걸어본다. 돌에 이끼가 껴서 그런지 제법 미끄럽다. 길동무들은 위험할 것 같다며 징검다리 건너기를 머뭇거리고 있다. 과감히 포기하고 우회도로를 걷기로 결정한다. 지름길을 포기하고 멀리 돌아서 걷는다. 건강을 위해 걷는 일이지만 안전이 우선되어야 한다. 덕분에 5km 정도 더 걷는다. 자전거 도로로 조성되어 있는 우회로는 편안하고 주변에 아름다운 꽃이 핀 꽃길이다. 왼쪽에는 푸른 초목지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오른쪽에는 임진강 상류가 흐른다. 차가 다닐 정도로 넓은 이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고 곧게 펼쳐져 있다. 산티아고 메세타 평원이 떠오른다. 일찍 피기 시작한 코스모스가 막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백일홍이 예쁘게 피어있다. 5km 정도 더 걷는 것이 더운 날씨에 반갑지는 않지만 걷기 위해 나선 길이니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걷는다.


우연히 들린 식당이 운 좋게 맛 집이다. 콩국수를 기대하고 식당에 들어갔는데 이미 모두 소진되어 어쩔 수 없이 순두부를 주문한다. 이열치열이다. 오히려 더운 날씨에 차가운 음식을 먹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시원한 맥주를 한잔 마시며 갈증을 달랜다. 땀을 흘린 후의 맥주 첫 잔은 언제나 최고다. ‘최고’라는 단어 외에 다른 더 적합한 수식어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식사와 맥주를 먹고 마시며 원기를 회복한다. 그리고 다시 걷는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길을 계속 걷는다. 지친 몸을 달래기 위해 잠시 그늘에서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준비해 온 간식을 나눠먹기도 한다. 그럼에도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고 점점 지켜간다. 쉬는 간격도 점점 짧아진다. 그만큼 지쳐가고 있지만 서로 격려하며 함께 걷는다. 힘든 분의 배낭을 대신 짊어주는 신사분도 있고, 앞뒤에서 격려하며 함께 보조를 맞춰주는 멋진 분도 있다. 혼자 걸으면 완주할 수 없는 길을 함께 걷기에 걸을 수 있다. 약간의 오르막길도 마치 대청봉을 오르듯 힘이 든다. 내리막길에서는 조금 더 다리 근육에 힘을 준다. 혹시나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그늘에서 쉰 후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이제 목적지까지 약 3km 정도 남았다. 앉았다 일어나며 혼자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도대체 왜 이 짓을 하고 있지? 누가 시킨 건가? 꼭 이 더운 여름에 걸어야 하나? 왜 경기 둘레길을 시작했지?” 순간 속으로 욕이 나올 뻔했지만 평상시의 내공(?)으로 튀어나오기 전 생각을 고쳐먹는다. 그리고 몸의 힘을 빼고 발의 감각에 집중하며 걷는다. 내가 걷는 것이 아니고 나를 길에 던져버린다. 나는 사람이 아니고 길가에 흩어진 자갈이 된다. 누군가는 그 자갈을 발로 차기도 하고,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면 바람을 맞고 비를 맞는다. 눈이 오면 눈의 차가움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눈 속에 파묻히기도 한다. 세월의 풍파는 자갈의 날카로운 부분을 둥글게 만들어 준다. 둥글어진 자갈은 구르기에 적합한 모습을 갖춰간다. 날카로운 부분이 잘려나가고 둥근 부분은 점점 더 둥글어지고 단단해진다. 바람이 불거나 누가 발로 차거나 비가 오거나 그저 그러려니 하며 받아들인다. 날카로운 부분이 없으니 남을 찌를 일도 없다. 이미 잘라져 나갔으니까. 둥근 자갈은 서로 품고 안아주고 함께 구르기도 한다.


걷기는 자신을 길에 던져버리고 자신을 버리는 일이다. 우리가 길을 걷는 것이 아니고, 길 위에 우리를 던지는 것이 걷기다. 길을 걸으며 자신의 편견과 오만은 저절로 사라진다.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버린다. 이런 행위는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고통은 원만한 삶을 위해 넘어가야 할 과정일 뿐이다. 원만함은 세상을 편안하게 살게 만들어 주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걸으며 ‘도대체 왜 이런 짓을!’이라는 날카로운 표현은 ‘왜 이 좋은 일을 사람들은 안 하지’라는 표현으로 순화되고 변화된다. 그리고 함께 걷지 않는 분들의 동참을 위해 마음으로 기도한다.


합정역에 도착해서 맥주 한 잔 마시고, 차 한 잔 마시며 살아가는 얘기를 이어간다. 각자 자신들만의 삶의 모습이 있다. 진솔한 얘기를 들으며 서로에 대한 이해를 넓혀간다.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게 되면 불만은 이해로, 불편함은 편안함으로, 미움은 사랑으로, 냉정함은 연민으로 변한다. 우리가 걷는 이유다. 이 길을 걷기 위해 많은 분들이 애쓰고 있다. 차량 수배와 식당 검색을 위해 큰 수고를 해 주는 사람도 있다. 길동무들의 짐을 대신 짊어지기도 하고 보조를 맞춰주는 아름다운 사람도 있다. 간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해 와서 기쁜 마음으로 나눠주는 사람도 있다. 안전 운행을 책임져 주는 기사님도 있다. 길을 만들고 관리해 주시는 분들도 있다. 하늘과 구름, 시원한 바람, 주변의 꽃과 녹색 초목,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이 우리를 반겨준다. 우리와 세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체감한다. 경기 둘레길 60코스 모두 완주할 수 있도록 도움 주시길 세상 모든 존재들에게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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