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둘레길 8코스를 걷는다. 율곡습지공원에서 장남교까지 걷는 길이다. 길 왼편에는 임진강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다. 무성한 나무와 풀들에 가려진 임진강의 모습은 보일 듯 말 듯하다. 강물 흐름 전체를 볼 수 없어서 약간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뜨거운 불볕더위 속에서 걷는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강렬한 햇살과 바닥에서 올라오는 지열 그리고 허공에 가득한 열기 속을 걷는다. 마치 한증막 속에서 옷을 입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걷는 느낌이다. 오전 10시 반경에 걷기 시작해서 5시간 5분 동안 19km를 걸었다. 그중 햇빛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약 20분 정도 걸을 수 있는 숲길 단 한 곳뿐. 나무가 만들어 준 그늘 속에만 들어가도 시원한 천국이다. 햇살이 강한 만큼 그늘 아래는 시원하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날씨와 상관없이 태평스럽게 흘러가고 모양을 바꿔가며 하늘에 그림을 그린다. 구름을 쳐다보며 걷는 괴로움을 잠시 잊기도 한다. 나옹 선사의 시가 떠오른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처럼 바라처럼 살다가 가라 하네.” 창공은 시의 내용처럼 구름 외에는 티끌 하나 없다. 걸으며 예쁜 하늘을 바라본다.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그 순간만큼 고통을 잊는다. 하늘과 구름, 청산은 모든 힘듦을 내려놓으라고 한다. 물론 잘 되지는 않지만 시를 되새기며 억지로 노력을 해본다.
1시간 반쯤 걸으니 파평면 행정복지센터가 나온다. 고맙게도 화장실을 개방해 주었고, 정수기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찬 물도 마시고, 식수도 보충할 수 있었다. 센터 내부는 시원한 냉기가 있어서 더위에 지친 몸을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복지센터 바로 아래 마을에 식당이 보인다. ‘박동화 해장국’ 식당이다. 해장국, 곰취 냉면, 소머리 국밥, 육개장 등이 있다. 우연히 들린 식당인데 맛도 좋고 식당 내부는 냉동고처럼 시원하다. 오아시스는 사막에만 있는 곳이 아니다. 더위를 식히고 잠시 휴식을 취하며 쉬어갈 수 있는 모든 곳이 오아시스이다. 오아시스(Oasis)는 사막에서 발견되는 물웅덩이다. 어원은 가마솥을 뜻하는 이집트어가 그리스어로 차용된 후 라틴어 Oasis로 차용된 것이라고 한다. 사막의 죽을 것 같은 더위와 갈증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안식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리가 걸은 길은 가마솥이고 파평면 행정센터와 식당, 나무 그늘, 그리고 우리가 매우 선호하는 휴식처인 토끼굴은 모두 오아시스다. 고속도로나 넓은 도로를 통과하기 위해 도로 밑에 만들어진 짧은 터널 같은 통로를 우리는 토끼굴이라 부른다.
왜 이 더위에 길을 걸을까? 아내는 며칠 전부터 무더위 기간에는 잠시 쉬고 조금 선선해지면 걷는 것이 어떠냐고 얘기한다. 이미 아홉 명이 신청을 했다고 하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아마 나를 포함해서 참석 신청한 모든 사람들이 아내에게는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길을 걸으며 왜 이 무더위 속에서도 걸을까 자꾸 생각하게 된다. 무더위뿐만이 아니다. 강추위 속에서도 걷고, 호우 속에서도 걷고, 폭설에서도 걷는다. 왜 걸을까?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손 인사를 하고 ‘파이팅’을 외친다. 그들 역시 인사를 하며 걷느라 수고한다는 말도 한다. 그 말이 재미있게 들렸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그들에게 우리들의 걷는 모습이 힘들고 이상하게 보였나 보다. 그들이나, 우리나 모두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엇인가에 미쳐서 걷고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다.
지쳐가며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침묵 속에서 자신과 대화를 한다. 시간이 흘러가며 자신과의 대화도 지쳐간다. 결국 이 대화조차 포기한다. 오직 몸으로 고통을 느낀다. 모든 말과 생각이 끊어진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몸과 그 몸이 걷고 있는 길과 앞에 펼쳐진 자연의 경치뿐이다. 그리고 걸으며 느끼는 고통이 있다. 몸이 느끼는 고통은 생각이 느끼는 고통과는 다르다. 생각은 상상을 하며 고통을 줄이거나 늘린다. 하지만 몸이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줄일 수 있거나 늘릴 수 없다. 몸은 그 고통을 고스란히 받고 느낀다. 몸 자체가 바로 고통이 된다. 생각은 상상이고 가면이다. 몸은 가면을 벗어버린 본래의 모습이다. 모든 가면이 사라진 후에 본모습이 드러난다. 그 본모습이 우리의 참모습이다. 그때 우리는 상상과 생각이 사라진 본래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람을 만나고 대할 때에도 가면을 벗어버리면 참 만남이 된다. 힘든 순간에 그 사람의 본바탕을 알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평상시에는 숨겨진 모습도 고통 속에서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아마 이 무더위에서 걷는 이유는 자신의 본모습을 파악하고 좀 더 성숙된 자신이 되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다.
무언가에 미치듯 몰입하고 그 몰입으로 인해 고통받고, 고통을 통해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될 때쯤 자연은, 또는 신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준다. 가마솥 같은 길을 걸으며 몸과 마음이 매우 지쳐 갈 때 하늘은 선물을 내려주신다. 황토돛배 근처 휴식처에서 잠시 쉰 후에 도착 지점으로 가는 마지막 구간인 장남교를 건너기 위해 남아있는 에너지를 쥐어짜며 다시 걷는다. 그때 하늘에서 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소리를 지르며 단비에 경배한다. 자연의 선물에 대한 화답이자 감사함의 표현이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춘다. 땅의 지열과 한증막 같은 허공은 시원함으로 채워진다. 우리 몸의 열기도 따라서 식어간다. 장남교를 건널 때부터 빗방울이 거세지고 호우가 시작된다. 온몸은 비로 젖고 신발 속에는 빗물이 가득하여 걸을 때마다 저벅저벅 소리가 난다. 마치 물속을 걷고 있는 느낌이다.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빗줄기를 뚫고 장남교를 건너 오늘의 도착 지점에 있는 스탬프 함을 찾아 스탬프를 찍는다. 스탬프잉크가 부족해서 경기 둘레길 패스포트에 잘 찍히지 않는다. 다음에 이곳에서 출발하니 그때는 잉크가 보충되길 바랄 뿐이다.
파주 콜택시를 불러 적성 우체국까지 가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까지 갈 계획이었는데, 콜택시는 불러도 오지 않는다. 비는 더욱 거세진다.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적성까지 가려면 다시 장남교를 건너야 한다. 지나가는 화물차를 무턱대고 세운 후 기사님께 부탁드려 지친 두 분을 먼저 보내드린다. 비가 조금씩 잦아든다. 검색을 통해 황토돛배 정류장에 문산역으로 가는 버스가 있다고 확인한 후 다시 장남교를 건너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버스 정류장에 도착 후 약 20분 정도 휴식을 취하며 물에 빠진 모습과 배낭을 정리한다. 비에 흠뻑 젖은 옷을 입은 채 버스를 타니 버스 안은 냉장고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우비를 입고 조는 길동무도 보인다. 추위와 졸음이 함께 찾아온 것 같다. 냉장고 같은 2층 버스를 타고 추위 속에서 벌벌 떨며 문산역에 도착했다. 오늘 걸은 경기 둘레길은 지옥과 천당이 반복되는 길이다. 날씨가 더우면 지옥이고 비가 오면 천당이다. 비가 많이 오면 지옥이고, 그치면 천당이다. 더운 날 냉방 버스를 타면 천당이고, 비 잔뜩 맞고 냉방 버스를 타면 지옥이다. 지옥과 천당은 정해진 곳이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에 따라 지옥이 천당이 되기도 하고, 천당이 지옥이 되기도 한다.
만약 이 길을 홀로 걷는다면 완주할 수 있었을까? 중간에 일찍 포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하지만 아홉 명의 길동무들이 무더위 속을 함께 걸은 덕분에 모두 무사히 완주할 수 있었다. 서로 격려하고 즐거운 대화도 나누고, 힘들 때는 침묵을 지키며 묵묵히 걸었다. 정자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시 쉬며 준비해 온 간식을 나눠 먹고 걸을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서로를 의지하며 걷는다. 길동무가 필요한 이유이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씀은 맞는 말이다. 오늘의 경험이 이 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후미를 봐주시고, 힘들어하는 분을 챙겨주신 비단님과 꽃가루님께 특별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날씨와 교통편으로 인해 호된 경험을 했다. 앞으로 걸어야 할 경기 둘레길이 많이 남아있다. 이제 겨우 전체 코스의 1/10 정도 걸었다. 앞으로 진행하는 경기 둘레길은 미니 버스나 승합차를 빌려서 움직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처음 나오셔서 힘들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었던 분에게도 감사함을 전한다. 지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불평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믿고 따라주신 참석자 모든 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