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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by 걷고

총 11명이 함께 걷는 날이다. 합정역에 모여 2200번 버스를 타고 성동사거리까지 이동한 후 걷는다. 버스 배차 간격이 약 20분 정도여서 혹시 늦게 도착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다리거나 먼저 출발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다행스럽게 모두 정시에 모여 기분 좋게 출발할 수 있었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개인적인 약속일 경우에는 정시에 맞춰 오지 않아도 그러려니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단체가 함께 움직일 경우에는 다르다. 시간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다른 참석자에 대한 예의이자 배려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의 표현이다.


‘약속’이라는 단어가 옛 기억을 소환시키며 지난 과거를 반성하게 만들어 준다. 약속을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본다. 나는 과연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인가? 약속의 대상은 누구인가? 얼마나 많은 약속을 하고, 그 약속을 얼마나 지키며 살아왔을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내와의 약속이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고, 여전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며 살고 있다.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많이 든다. 지키지 못한 가장 큰 약속은 결혼 전 한 약속으로 “결혼 후 손에 물 묻히지 않게 해 줄게”라는 약속이다. 결혼한 지 37년이 지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약속은 이행되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 아내 손은 잠시도 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집안 일로 편히 쉴 날이 없다. 손등의 주름도 많이 늘었고 손은 많이 거칠어졌다. 죽을 때까지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한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약속을 했고, 지키지 못하며 살아왔다. 그럼에도 아내는 짜증 한번 내거나 싫은 기색도 없이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딸로서, 할머니로서 자신의 역할을 완벽하고 충실하게 하고 있다. 어느 순간 아내의 이름과 정체성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아 많이 안쓰럽고 미안하다. 그나마 아내가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모임이 있어서 다행이다. 고교 졸업 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만나고 있는 동창생 모임으로 요즘은 매주 만나 걷고 맛있는 것 먹고 즐겁게 얘기하며 지낸다. 이 모임에 나가는 것을 무조건 지지해 주는 것과 가능하면 아내가 싫어하는 언행을 하지 않는 것이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다. 늦게 오는 날은 버스 정류장이나 전철역으로 마중 나가 모시고 오는 것도 나의 역할이다. 기꺼이 나가서 모시고 오면서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내에게 수많은 말 빚을 지고 살고 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한 대상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나 자신과의 약속이다. 매일매일 할 일을 하루 전에 자신과 약속하고, 다음 날 미안하다는 생각도 없이 뻔뻔스럽고 자연스럽게 미루거나 이행하지 않는다. 매일매일 상상 속에서 성을 쌓고 부수기를 평생 해 왔다. 쌓을 때는 신이 나서 좋아하고, 부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부수곤 잊어버린다. 그렇게 살아온 삶의 최종 결과물이 지금의 ‘나’이다. 물론 지금의 자신 모습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음에도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면 수많은 기회를 놓치고, 어리석은 판단과 결정을 내리고, 자신과 한 약속을 불이행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 자신이 한편으로는 안쓰럽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망스럽기도 하다. 자신과 가정의 밝은 미래를 위해 유학을 결정하고 포기했던 약속도 있다. 사업에 성공해서 가족들이 편안하고 풍요롭게 지낼 수 있게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도 있었다. 마음공부를 위한 수행 지침을 만들어놓고 그 약속을 매일매일 어기며 살아왔다. 그리고 그런 불이행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자신과의 약속에서 수많은 말 빚을 지며 살아왔다.


언젠가는 자신과 약속을 하지 않겠다는 어리석은 약속도 했다. 자신과 아무런 약속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냥 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낸다는 것이다.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시간의 중요성을 느끼게 된다. 살아갈 날이 그만큼 줄었다는 의미다. 따라서 시간을 돌이키거나 늘릴 수는 없어도 주어진 시간을 충실하게 활용하는 것은 나 자신과 사회를 위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결국 하루를 잘 보내자는 약속을 자신과 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한 약속은 꾸준히 명상하고, 걷고, 글 쓰고, 독서하는 일이다. 이 약속은 그나마 어느 정도 지켜지고 있다. 명상하며 마음 건강을 챙기고, 걸으며 신체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걸은 후 느낌을 글로 쓰며 마음 밭을 정갈하게 가꾸고, 독서하며 마음의 자양분을 흡수한다. 자양분은 걸으며 성찰하는 밑거름으로 사용하고, 성찰된 내용을 글로 표현하여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다. 공유할 것을 좀 더 충실하게 하기 위해 다시 독서를 한다. 내적 성장을 위한 나선형 반복 과정이다.


함께 걸었던 길동무 중 한 사람은 매일 아침 8km 이상 걸으며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수개월 이상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고, 지금은 그 약속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고 했다. 신체적인 건강을 회복하고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자존감이 올라가며 삶의 만족도도 높아졌다. 그런 자신이 자랑스럽고, 자랑스러운 자신에게 보상을 해 주기 위해 최근에 좋은 카메라를 선물했다고 한다. 멋진 삶이다. 루틴은 만들기는 어렵지만, 일단 만들고 유지하면 루틴이 우리를 만들어준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는 어느 서점의 슬로건처럼 '사람이 루틴을 만들고, 루틴이 사람을 만든다'. 그 친구는 내년에 사위와 함께 산티아고 길을 걸을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해서 다시 한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멋진 그 친구와 사위에게 응원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나의 졸저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길, 산티아고’를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이행될 것이다. 산티아고에서 만난 길동무 도니님은 자신이 찍은 산티아고 사진 한 장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했다.


무더위 속에서도 11명의 길동무들과 함께 걷기로 ‘약속’한 경기 둘레길 6코스를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마쳤다. 후련하고 개운하고 뿌듯하다. 경기 둘레길 6코스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위치한 길로 프로방스 마을을 지나 자유로 옆길을 따라 걷는 길이다. 문산읍 당동리를 지나 임진강 변으로 나오면 반구정에 도착하게 된다. 반구정은 조선 시대 재상 황희 정승이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다. 총 거리 20km에 달하는 코스로 길은 대부분 평지로 이루어져 있다. 찜통 같은 더위에 약 5시간 정도 걸어서 무사히 마쳤다. 다행스럽게도 마지막 약 1시간 정도는 숲길이 조성되어 있어서 지친 몸을 쉬게 만들어 준다. 이 길은 늦가을이나 겨울에 걸으면 편안하고 즐겁게 걸을 수 있는 코스다.


무더위로 무척 힘든 상황 속에서도 서로를 위해 힘든 티를 내지 않고 완보하며 ‘약속’을 지킨 길동무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성공적으로 길을 마치면 뿌듯함과 대견함, 자랑스러움, 그리고 다른 길도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 등이 보상으로 주어진다. 보상을 위한 걸음은 아니지만, 저절로 돌아오는 노력에 대한 결실을 일부러 무시할 필요도 없다.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길동무 한 명이 자신의 걷기 철학을 얘기해서 주의 깊게 들었다. ‘힘든 길도 길이고, 쉬운 길도 길이다. 힘든 길을 걸으며 숨을 몰아쉬기도 하지만, 언젠가 힘든 길은 끝나고 다시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그냥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 된다.’ 멋진 말이다. 그것이 걷는 길이든, 아니면 삶의 길이든 그냥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나는 앞으로도 많은 약속을 자신과 가족, 그리고 친구들에게 하며 살아갈 것이다. 다만 말 빚을 줄이기 위해 약속을 신중하게 하고, 가능하면 지키도록 노력하며 살아갈 것이다. 경기 둘레길을 걷는 것도 지켜야 할 약속이다.

20220709_111738.jpg 앞으로 열릴 약속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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