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시 30분에 운양역에서 만나서 7번 버스를 타고 전류리 포구에 내려서 걷기 시작한다. 지난번 걷기를 진행할 때 10시에 모여서 7번 버스는 놓쳤던 기억이 있어서 30분 일찍 모였다. 한 시간에 한 번씩 운행하는 버스 시간을 맞추는 방법은 정류장에 일찍 도착해서 여유롭게 기다리는 것이다. 운 좋게 버스가 빨리 도착해서 9시 45분경 버스를 타고 전류 포구에 도착하니 10시. 전류 포구에서 일산대교 방향으로 걷는 길은 평화누리 자전거 길과 겹치는 구간으로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아서 조심해서 걸어야 한다. 좁은 길을 자전거족과 걷기족이 교행하며 겯기 위해서 서로 양보하고 배려해야 한다. 자전거족의 선두가 반갑게 인사를 하며 지나가고 우리도 답례를 한다. 먼저 손을 내미는 여유가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주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하며 길을 양보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길 좌측에 세워진 철조망 벽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철조망 건너편에 자연스럽게 조성된 숲길이 보인다. 강 바로 옆에 조성된 좁은 길인데 아마 군인들이 보초를 서기 위해 다니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길인 것 같다. 언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길을 평화롭게 걷고 싶다. 걸을 수 없는 길이기에 더욱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숲길 너머 한강이 무심하게 흐른다. 한강과 숲길 사이에 자동차 바퀴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다. 군용차들이 초소 관리를 하기 위해 이동하며 만들어진 길인 것 같다. 이 길도 걷고 싶다. 길을 걸으며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욕심일까? 길이 주는 위로와 치유의 힘이 있다. 잃어버린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걷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길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다. 길은 걷는 사람에게 길을 가르쳐준다. 길이 우리의 스승이 된다.
비단 길 뿐이 아니다. 자연 역시 우리의 스승이다. 사계의 변화는 무상의 진리를 가르쳐준다. 다양한 꽃과 식물은 서로를 비교하지 않고, 서로를 닮아가기 위해 성형하지 않는다. 다양성이 주는 풍요로움이 자연을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가끔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보면 얼굴에 개성이 드러나지 않아 마치 로봇이나 인조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람이 아닌 사람. 사람 모습은 맞는데 개인의 개성이 보이지 않는 획일화된 사람만 보인다. 마치 국화빵을 찍어내고 있는 것처럼 모두 같은 얼굴과 표정을 짓고 있다. 개성이 사라진 개인이 존재할 수 있을까? 외모로 비교하고 평가하고 때로는 타인의 모습이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인간들만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철책으로 ‘나와 너’를 구분한다. 땅에도 금을 긋고 ‘너와 나’의 소유를 구분한다. 하늘에도 금을 긋고, 바다에도 금을 긋는다. 나라의 경계마다 장벽을 세우고 입국 심사를 한다. 인디언들은 종이 문서로 땅을 사고파는 미국인들이 이해되지 않았다고 한다. 자본주의자 만들어 낸 참 우스꽝스럽고 해괴망측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의 땅과 집을 사기 위해 평생 몸 바쳐 일을 한다. 원하는 것을 얻고 나서는 한 순간 좋아하며 더 크고 넓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또 자신을 바친다. 그것뿐만 아니다. 높은 벽과 울타리로 ‘너와 나’를 나누며 그 안에서 자신만의 안락함을 추구한다. 몸은 안락할 수 있겠지만, 마음은 늘 더 높고 넓은 곳을 향해 잠시도 가만히 쉬지 못한다. 가끔 외계인들이 지구를 습격하는 상상을 한다. 외계인들에게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국가의 경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외계인들이 침공하면 대응하기 위해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전쟁이 멈추지 않을까라는 상상도 해 본다. ‘너와 나’를 나누는 순간 분쟁이 발생하게 된다. ‘너와 나’가 ‘우리’가 되지 않는 한 잠시도 갈등은 멈추지 않는다. ‘너’와 ‘나’의 구분을 짓는 경계가 피부라고 얘기한 학자도 있다. 피부 안은 ‘나’이고, 피부 밖은 ‘너’라는 의미다. 하지만 좀 더 깊게 파고 들어가면 피부 안의 ‘나’ 안에도 여러 모습의 ‘나’가 존재한다. ’따뜻한 나‘와 ’ 차가운 나‘가 있고, ’ 이기적인 나‘와 ’ 이타적인 나‘도 있다. 자신의 내부에서도 두 개 이상의 자신이 존재하기에 내부 안에서도 갈등은 죽 끓듯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햇빛을 가릴 그늘조차 전혀 없는 길고 지루한 평지를 걷는다. 다행스럽게 하늘이 구름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바람은 우리에게 시원한 자연 냉풍을 불어준다. 자연에 순응하며 함께 살아가는 걷기족에게 자연은 시기적절한 멋진 선물을 제공한다. 지루한 포장길과 자전거 도로를 지나니 ‘한강 야생 조류 생태공원’이 나온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느낌이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며 그간 걸어오느라 수고했다며 편안한 휴식처를 제공해 준다. 공원은 매우 편안하고 차분한 느낌이 든다. 잠시 쉬는 순간 우리의 몸과 마음도 충분한 휴식을 취한다. 준비해 온 간식을 나눠 먹으며 우정도 쌓아간다. 공원에서는 '너와 나'를 차별 없이 받아주고, 나눠먹는 간식은 '우리'의 간식이 된다. 공원을 지나 일산대교 진입로까지 가는 길에 악취라는 전혀 예상도 못한 장애물을 맞이한다. 악취의 근원은 알 수 없지만, 숨을 쉬며 걷는 우리들에게 악취는 걸어야 할 험난한 길보다 더욱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함께 걷는 어느 누구도 악취에 대한 어떠한 불편함도 표현하지 않고 서로를 응원해주고 있다. 말 없는 응원이 고맙다. 티 내지 않는 배려심을 지닌 멋진 길동무들이다.
꽃가루님, 비단님, 도니 님, D가 그분들이다. 꽃가루님은 걷기의 달인이다. 국내의 다양한 길을 많이 걸었고, 핸드폰에는 수많은 걷기 완주 배지들이 가득한 마음부자이며 배지부자다. 여유롭고 경쾌한 발걸음과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멋진 친구다. 비단님은 20kg을 감량한 후 8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 체중을 유지하고 있는 의지의 여성이다.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밝고 멋진 사람이다. 도니님은 나와 산티아고에선 만난 친구로 사진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혼자 해파랑길, 남파랑길,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을 완주했고, 지금은 서해랑길을 걷고 있는 친구다. 텐트를 짊어지고 다니면 길 위에서 잠을 자고 길 위를 걷는 멋진 사나이다. D는 사업의 어려움을 극복해 낸 후 인생 2막을 아름답게 준비하고 있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나이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듯이, 그의 인생의 부침은 그만큼 그를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인생의 큰 좌절은 하늘이 내려주신 큰 선물이다. 좌절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성숙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과 상황과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런 길동무들과 함께 걷는 즐거움은 다른 어떤 즐거움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
일산대교를 지나 일산으로 접어들었다. 도심 외곽이지만 공원이 매우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다. 길을 걸으며 대한민국은 참 살만한 나라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공원이 곳곳에 잘 조성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네 삶의 여유가 그만큼 생겼다는 의미다. 목적지인 동패 지하차도 가는 길에 'GAZA전시장'이 있다. 함께 걷는 도니님의 사진이 전시된 곳이다. 전시장 개관을 축하하는 전시회로 많은 작가들의 사진, 조형물, 조각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곳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며 도니님을 축하해 주며 오랜만의 문화생활을 만끽했다. 전시장에서 목적지까지는 약 300m 정도 되는 거리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스탬프를 찍으며 완보를 기념하는 사진도 찍었다.
스탬프함에서 가좌동 종점까지 걸어가서 9701 또는 9707 버스를 타고 대화역으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이때 드디어 ‘바보 삼 남매’가 실체를 드러낸다. 미리 이 길을 다녀온 사람이 위치를 휴대전화에 찍어주었는데도 길을 찾아 헤매고 있다. 내 휴대전화의 기능은 다른 사람 것과 기능과 다른지 위치를 찾을 수 없다. 기능이 문제가 아니고 사용하는 주인의 문제다. 두 길동무들도 휴대전화를 켜고 길을 찾기 시작한다. 함께 헤매고 또다시 길을 찾는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D님이 우리에게 ‘바보 삼 남매’라는 애칭을 붙여주셨다. 하지만 바보는 ‘바라보는 모든 것이 보물’의 준말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다. 우리에게 길을 헤매는 것은 보물 찾기와 같은 즐거움이다. 마침내 우리는 보물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대화역에 내려서 마신 시원한 맥주 한잔의 즐거움은 온 세상을 보물로 만들어주었다. 앞으로도 우리 ‘바보 삼 남매’의 걷기는 계속될 것이고, 누구든지 ‘바보’의 세상에 오는 것을 기꺼이 환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