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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의 공생

by 걷고

운양역에서 모여 시작점까지 함께 이동하기로 한 날이다. 7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대가 온다. 10시에 만나기로 한 참석자들이 아직 모두 모이지 않았다. 기시님에게 다음 차는 언제 오느냐고 물으니 한 시간 후에 온다고 한다. 참석자들과 모여 택시를 타고 가기로 결정한 후 김포 콜택시로 전화를 한다. 택시로 약 30분 정도 이동 후 한재당에 도착해서 걷기 시작한다. 오늘 걸을 3코스는 애기봉 입구에서 전류리 포구까지 17.2km를 걷는 길이다. 모두 평지로 이루어져 있고, 강한 햇빛에 노출된 채 걸어야 한다. 비 소식이 있어서 마음속으로 쾌재를 불렀는데, 비대신 강한 햇빛이 우리를 맞이한다. 더위를 식혀 줄 비가 오지 않아 서운했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조금 식혀준다. 바람을 선물해 준 자연에 감사를 표한다.


자연은 인간과는 별개로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간다. 자연은 자연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인간은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간다.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자연이 우리의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결국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말씀 중에 '하늘에 순응하는 사람은 흥하고, 하늘에 역행하는 사람은 망한다'는 말씀이 있다. 자연의 섭리를 따르며 순응하고 살아가고,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며 살아가라는 삶의 지혜다. 오늘 길을 걸으며 더위와 싸우거나 회피하지 않고 더위와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배운다.


말로만 들었던 김포평야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떤 모습인지 전혀 몰랐지만, 오늘 길을 걸으며 눈으로 확인하고 몸으로 익힌다. 넓은 평야를 보니 마음과 눈이 시원하다. 논에는 물이 적당히 차있다. 치수(治水)를 잘 한 덕분이다. 가뭄으로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은데 비해 이곳 농부들은 매우 풍요로운 수확을 보장받은 것 같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라는 말이 있다. 곳간이 가득하면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여유와 나누는 여유로운 마음을 갖게 된다. 곳간이 비어있으면 생존을 위해 힘든 투쟁을 하기도 한다. 김포에 사는 분들은 매우 복 받은 분들이다. 전원주택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장미꽃으로 입구를 아름답게 장식한 주택도 있고, 넓은 부지에 여유로운 공간을 충분히 활용해 지은 한가로운 집도 보인다. 2층으로 지어진 집의 테라스에는 불투명 유리로 외부와 차단한 채 길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는 집도 보인다. 세상을 등지고 살고 싶은 사람인가 보다. 예전에는 이런 삶을 꿈꾼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어느 곳에 있어도 마음이 편안하면 그곳이 바로 휴양지이고 별장이다. 별장에 머물면서 마음이 불편하거나 일상사로 가득하다면, 몸만 별장에 있고 마음은 복잡한 세상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어는 곳에 있든 마음만 편하다면 쉬기 위해 굳이 어딘가로 이동할 필요도 없다. 시간이 흐르며 많이 변한 자신을 발견한다. 어디에 있든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처음 나온 길동무도있지만 걷기 동호회인 ‘걷기 마당’에 가입한 순간 더 이상낯선 사람이 아니다. 동호회가 만들어 주는 소속감은 마음의 벽을 허물고 마치 옛 친구를 대하듯 즐거운 대화를 나눈다. 서로 인사를 나누며 함께 걸으면 더 이상 남이 아니다. 친구이고 이웃이고 길동무이고 인연이 깊은 분들이다. 따라서 그들의 즐거움과 고통은 나의 것이 될 수도 있다. ‘남’과 ‘나’가 ‘우리’가 되는 아름다운 모습이다. 따님의 사춘기 얘기를 하는 분도 있다.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이 편안해졌고 상황이 개선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딸의 사춘기를 매우 힘들게 겪어낸 후배 얘기를 해주며 시간을 기다리고 흔들리지 않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조언을 해 주었다. 그리고 그 친구의 마음에 공감해 주며 앞으로도 서로 힘든 얘기도 나누며 함께 걷자고 했다.


후배의 딸은 사춘기를 매우 혹독하게 치루었다. 딸이 가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인내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여름휴가 때는 남해안 약 200km를 딸과 함께 걸으며 딸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하기도 했다. 딸과 함께 해외 봉사활동을 다니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는 이국의 어린 친구들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 모임에서도 늘 딸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안타까웠던 적도 많았다. 늦게 정신 차리고 공부해서 간호대학에 입학한 후 지금은 예쁜 딸로 부모에게 효도를 하며 간호사로 즐겁고 열심히 살고 있다. 힘든 과정을 극복한 후 가족은 점점 더 단단해지며 강한 가족애를 느낀다. 마치 비 온 후 땅이 더 굳듯이.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으로 뻗은 길이 펼쳐진다. 걷는 길 좌우에는 모가 잘 자라고 있는 생기 가득한 녹색의 평야 밖에 보이지 않는다. 산티아고의 메세타 평원이 떠오른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길이 지루하다며 점프를 한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지만, 나는 메세타 평원을 걸을 때 정말 행복했었다. 끝없는 길을 걷는 것이 끝없는 삶과 같다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오히려 길이 끝나는 것이 안타깝고 아깝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저 멀리 산과 강이 보인다. 평야와 강 사이에 살벌한 철조망 벽이 세워져 있다. 철조망과 강 사이에 사람 흔적이 없는 수풀 가득한 지역이 있다. 언젠가는 그 철조망이 걷히고 자연만이 숨 쉬는 그 지역에 좁은 오솔길이 생기면 좋겠다. 평화 누리길과 겹치는 경기 둘레길을 걸으며 철조망이 빨리 걷히길 기도한다. 평화 누리길은 철조망 벽이 허물어져야 그 이름값을 할 수 있다. 평화는, 사람 간의 평화든 나라 간의 평화든, 서로를 가로막는 벽이 허물어져야 이루어진다. 서로를 경계하는 한 참다운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조류 휴양소를 지나간다. 상처 입은 조류를 치료하고 야생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재활 훈련을 하는 곳이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자연과 모든 동식물과 공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다는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자연은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자연의 이치에 따르지 않고 저항하는 삶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한다. 자연이라는 생명체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폭풍, 해일, 토네이도, 혹한과 혹서, 가뭄과 폭우 등 이상 기후 현상은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자연의 몸부림이다. 인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연을 훼손하는 모든 행동들이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불편과 불행만 초래한다. 동식물들도 많이 사라지고 있다. 벌이 많이 사라져서 농가가 힘들어한다는 뉴스도 나오고 있다. 외래종이 들어와 국내의 생태계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자연과 동식물들과 함께 공생하는 방법을 찾고 노력해야만 한다. 나 혼자만 또는 인간만을 위한 삶은 결국 자신과 인간을 고통 속에 빠트린다.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은 자연을 존중하고 함께 공생하며 살아간다는 의미다.


전류리 포구가 저 멀리 보이고 몸은 서서히 지쳐간다. 도착지점인 포구는 걸을수록 뒤로 물러가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드디어 3코스 종료지점에 도착했다. 스탬프 북에 도장을 찍으며 서로에게 축하 인사를 전한다. 혼자 걸었다면 끝까지 걷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은 구간이다. 함께 걸었기에 완주할 수 있었다. “혼자 걸으면 자신과 타협을 할 수 있다.”는 명언을 한 길동무가 있다. 그 말은 바꿔 얘기하면 “혼자 걸으면 언제든 중간에 포기할 수 있다.”가 된다. 같은 의미도 표현 방식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말과 글이 주는 힘이자 허상이다.


도착한 후 근처 편의점에서 맥주를 구입해 벤치에 앉아 건배하며 시원한 첫 잔을 마신다. 땀 흘린 후 마시는 첫 잔의 맛은 말과 글로 완벽하게 표현해 낼 수 없다. 표현하는 순간 이미 그 맛은 사라져 버린다. 편의점 앞에 버스 정류장 표시가 없는 정류장이 있다. 차가 언제 도착할지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늘 검색해서 시간 맞춰 다니는 삶에 익숙한 사람들이 언제 올지도 모르는 차를 기다리는 재미는 당황스럽기보다는 오히려 스릴감이 느껴진다. 사람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적응은 생존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강한 종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적응하는 종이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다. 기다리며 맥주 한잔을 다시 마신다. 버스가 저 멀리서 보이자 모두 길가로 나가 손을 흔든다. 어린 시절 버스를 향해 달려가던 기억이 떠오른다. 마을버스 7번을 타고 운양역으로 출발한다. 마을버스답게 동네 구석구석을 달린다. 동네 모습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80년대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마치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돌아간 느낌이다. 마을을 벗어나 신도시로 접어들며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7번 마을버스는 과거와 현재를 달리는 타임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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