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주의보가 내린 날이다. 아침부터 무덥다. 그럼에도 우리는 걷는다. 사람들은 이 무더위에 집에서 에어컨 틀어 놓고 편하게 쉬지 왜 애써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무더위 속에서 걷는 것 자체가 잘못된 행위도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걷기로 결정을 했고, 모여서 함께 걸었다. 그것도 16명이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과의 안일한 타협도 하지 않고 집안을 박차고 나와서 약 19km에 달하는 길을 5시간에 걸쳐 걸었다. 대부분 지루하고 햇빛을 피할 그늘조차 없는 길이다. 시작 지점에 위치한 심학산과 종료 지점 부근의 파주 살레길만이 그늘을 피할 수 있는 숲길이다. 심학산을 오르는 길은 오늘 걸을 길을 맞이하기 위한 일종의 신고식이다. 하지만 신고식을 치르기 위한 사전 신고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좌 버스 종점에서 동패치하차도까지 찾아가는 길에서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다. 길치인 리더를 대신해서 길동무인 나들이님이 길을 안내하기 위해 앞장서며 걷고 있다. 하지만 동패지하차도는 마치 숨바꼭질하듯 눈에는 보이는데 찾아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 걷는 길의 재미와 험난함을 예고하는 전주곡이다.
16명이 일렬종대로 숲길과 도로를 따라 걷는 모습이 마치 군인들이 행군하는 것처럼 보인다. 군대에서는 행군 훈련을 하며 월급을 받지만, 우리는 비용을 지불하며 즐겁게 걷는다. 군대에서는 하기 싫은 훈련을 억지로 하지만, 우리는 힘든 길을 기꺼이 걷는다. 그리고 보상으로 몸과 마음의 건강을 얻는다. 게다가 힘든 길을 마친 후 스스로 해 냈다는 자긍심도 느끼게 된다. 이 자긍심은 삶의 어떤 난관도 뚫어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또한 함께 걸으며 길동무로서 동지 의식도 느낀다. 이 길은 혼자 걸으면 중간에 포기할 가능성이 높은 길이지만, 함께 걷기에 단 한 사람의 낙오도 없이 길을 마칠 수 있었다. 서로 격려하고 도움을 주고받고 의지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단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모두 함께 완주해서 리더로서 너무 다행스럽고 고맙다. 산과 길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기도 하지만, 완주 후 뿌듯함과 자신감이라는 훈장을 선물해주기도 한다. 그 선물을 받으며 미소 짓는다. 직접 몸을 움직이고, 건강한 땀을 흘리고, 하고 싶은 일을 성취한 후의 미소는 삶의 모든 고뇌를 씻어 준다. 숨이 턱 막히는 무더위 속에서 길을 걸으면 일상 속 모든 어려움은 저절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길을 걷는 힘듦 덕분에 일상 속 번민과 스트레스를 저절로 내려놓게 된다. 개인적인 경험에 의하면 두 시간 이상 힘들게 걸으면 머릿속 생각과 일상의 고민거리조차 들고 다니기가 귀찮아지기도 하고 무거워 저절로 내려놓게 된다. 그리고 그 힘듦은 보람과 자신감, 뿌듯함, 그리고 건강한 심신으로 보상해 준다.
길동무인 나들이님은 바쁜 시간을 내어 길 안내를 도와주기도 하고, 식염 포도당을 나눠주며 함께 걷는 길동무들의 건강을 위한 세심한 배려를 해 준다. 처음 나온 히란야님은 오늘 걷는 길이 집 주변에 있는 아침 산책로라며 친절하게 길 안내를 해 준다. 각자 준비해 온 식사를 나눠 먹으며 동지애를 느낀다. 물이 부족한 사람에게 물을 나눠주는 사람도 있고, 사진을 찍으며 기록을 남기고 좋은 추억을 사진으로 선물해 주는 사람도 있다. 길을 걷는 데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지만 힘듦을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격려하며 함께 걷는다. 힘든 삶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이라도 손을 내밀어 준다면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어떤 힘든 일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 친구, 도반, 길벗이 중요한 이유다.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는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오늘 함께 걸은 길동무들은 우리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길은 나눔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의 현장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길을 안내하고, 음식을 나눠주고, 마음을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는 것도 모두 ‘나눔’이다.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물론 ‘자발적 고독’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자발적 고독’은 ‘나눔’이 전제되어야만 그 의미가 살아난다. ‘고독’을 통한 성찰은 사회 속으로 돌아와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미치는 ‘나눔’이 된다. ‘사람 인(人)’이 서로 의지하는 모습을 표현한 한문이듯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다. ‘따로 또 함께’라는 삶의 방식이 고해(苦海)를 건너는 현명한 방법이다. 혼자 또는 함께 길을 걸으며 ‘나눔’을 생각하는 일은 멋진 일이다. 비록 경제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성취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나눌 수 있는 것이 많이 있다. 따뜻한 마음과 웃는 얼굴, 겸손하고 부드러운 말 한마디 등 나눌 수 있는 것이 많다. 경기 둘레길 5코스를 걸으며 ‘나눔’에 대한 생각이 특히 많은 든 이유는 길동무들 덕분에 이 길을 완주할 수 있었다는 ‘고마움’ 때문이다. 힘든 것을 참아내고 힘든 티를 내지 않으며 묵묵히 걸어가는 모습도 엄숙하고 아름다운 ‘나눔’이다.
며칠 전 나의 SNS를 보고 시각 장애인 한 분이 메일을 보내왔다. 금년 봄에 제주 올레길을 완주했고, 가을에 산티아고 길을 걸을 계획을 갖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한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제주 올레길을 걸었던 것이 기사화된 자료도 보내왔다. 기사를 읽어보니 20대 중반에 시력을 상실한 후 힘든 시간을 겪으며 다시 일어선 분이다. 스스로 ‘바닥을 치고 올라왔다’고 자신의 상황을 단 한 마디로 표현했다. 그 표현이 통쾌하고 멋지다. 우리 모두 삶의 과정에서 최소한 한 번 이상 ‘바닥을 치는’ 경험을 한다. 그 경험은 하늘이 주시는 귀한 선물이다. 자신을 돌아보고 올바른 방향으로 살아가라는 하늘의 은혜며 나눔이다. 그는 상담학 석사와 사회복지사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동료 상담을 하고 있고, 장애인을 위한 프로그램을 구상 중이라고 한다. 너무 반갑고 고마웠다. 그분과 나의 공통점이 있다. 걷기, 상담, 명상에 관심을 갖고 있고, ‘나눔’을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요 저녁 침묵 걷기에 초대했다. 그 분과의 만남이 기대된다.
예전에 서울 둘레길을 걷기 위해 석수역에서 내린 적이 있다. 석수역 역사 내에 시각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무슨 모임인지 물었다. 등산 동호회인데 가끔 시각장애인들과 함께 걷는다고 했다. 지금 그 동호회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기억이라기보다는 전율이라는 표현이 더 맞다. 시각 장애인들의 모습은 들떠 보였다. 산길을 걷는다는 기대감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 비장애인들의 모습은 긴장되어 보였다. 안전하게 길을 마쳐야 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혼자 잠깐 생각해 보았다. 만약 시각장애인과 함께 걷는다면 무엇을 준비하고, 길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걸을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며 그날의 일은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런데 시각 장애인 한 분이 연락을 먼저 해왔고, 만나서 함께 걷기로 하면서 기억 창고 속에서 예전의 기억을 다시 꺼내게 되었다. 그와 함께 걷는 경험이 매우 귀한 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길이 가르쳐 준 ‘나눔’이 나의 길이 되어가고 있다. 좋은 일이다. 굳이 무엇을 찾아 이루려고 애써 고민하거나 노력할 필요가 없다. 주어진 환경과 사람과 상황을 맞이하면 된다. 길은 ‘나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