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파티 Amor Fati

by 걷고

“아모르파티 Amor fati는 니체의 운명관을 나타내는 용어.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의미로, 인간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설명하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용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모르파티’라는 노래가 있다. 신나게 부르는 노래를 들으면 삶의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용어의 뜻을 확인하면서 아모르파티는 ‘삶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고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따라 고락(苦樂)이 결정된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 ‘붓다의 치명적 농담, 한형조 교수의 금강경 별기’라는 책을 읽고 있다. 그중 불교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쉽게 표현한 글이 있다. “불교가 문제 삼는 것은, 객관적 실제(實際)가 아니라 ‘그 실제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시선’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교가 점검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 의해 ‘구성된’ 세계라는 말입니다.” 즉 같은 상황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판단을 하고 그에 따른 삼업(三業)을 짓게 된다는 의미다. 따라서 똑같은 상황을 맞이한 사람들의 언행이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스트레스 역시 같은 맥락이다. 스트레스 전문가인 한스 셀리 (Hans Seyle)에 따르면 스트레스는 스트레스 상황 자체가 주는 것이 아니고,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스트레스를 받거나 받지 않게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과제가 주어졌을 때 과제 자체가 주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상반된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상사가 자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 일부러 부담되는 과제를 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과제에 대한 스트레스와 상사에 대한 불만이 조직 전체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져 심각한 고통을 받게 된다. 반면 조금 부담되는 과제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라고 판단하고 열심히 노력해서 프로젝트를 성공리에 마치고 나면 자기 효능감을 갖게 된다. 이 효능감은 사회생활을 하거나 가정생활을 하는데 자신감과 매우 긍정적인 태도를 지닐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같은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반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은 비단 불교 이론이나 철학적 사유 없이도 일상생활 속에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다.


어제 아내에게 화를 냈다. 외부에서 업무를 마치고 전화를 했는데 딸네로 오면 좋겠다고 한다. 전날 통화를 하면서 업무 마친 후 우리 집으로 가겠다고 했는데 딸네로 오라고 번복해서 약간 기분이 상했다. 아내와 불필요한 말다툼을 하기 싫어서 딸네로 갔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2시간 반이나 걸렸다. 시간이 예상보다 많이 걸리자 아내는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식사를 하는데 바지를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상의도 편하게 입으라고 말하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옷 입는 것조차 잔소리를 하는 것 같아 화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딸네로 오라고 한 것 때문에 이미 기분이 조금 상한 상태였는데, 옷 입는 것에 대한 잔소리(?)가 불 난데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제발 잔소리 좀 그만하라고 약간 언성을 높였다. 아내는 내가 딸네로 오니 마치 보너스를 받은 느낌이라고 혼잣말을 하듯 말을 했다. 오늘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선뜻 오겠다고 얘기하니 기분이 좋아 보너스를 받은 것 같다고 한 것이다. 그 말을 들이니 미안했다. 그냥 남편이 온다니 좋았고, 점심 먹는 모습을 보며 옷을 편안하게 입고 먹으라고 나를 위해 한 말이었다. 그 말을 통제하거나 잔소리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했던 것이다. 많이 미안했다. 상황을 해석하는 데 이미 마음이 오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오염된 상태에서는 모든 상황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아모르파티, 즉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은 주어진 상황을 수용하라는 의미다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니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고 그냥 주어진 대로 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과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과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운명론에 갇힌 수동적인 삶이고, 후자는 운명을 수용하는 능동적인 삶이다. 전자는 자신의 의지가 없고 어떤 노력을 해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삶이고, 후자는 자신의 의지와 판단으로 주어진 상황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매일매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삶이다. 아내가 딸네로 오라고 하면 별다른 일이 없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면 되는 것이다. 밥 먹을 때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관심과 배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마음이 이미 오염된 상태에서 상황을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해석하며 이미 감정의 노예가 된 것이다.


실제(實際)는 하나인데 받아들이는 것에 따라 수 만 가지 세상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각자가 맞는다고 큰소리친다. 정치인들은 자신과 당의 이익에 기반한 색안경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본다. 그리고 남이 틀렸다고 우기고 싸운다. 자신의 안경을 벗을 생각조차 하지도 않고, 안경을 끼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식하지 못한다. 무지(無知)다. 무지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조차 모르는 것이다. 알고서도 잘못된 주장을 한다는 것은 무지와 파렴치가 섞인 것이다. 무지를 무지라고 깨닫게 되면서 비로소 인간은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노예에서 주인이 되는 것이다.


주관과 객관의 차이를 생각하면 할수록 할 말이 없어진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얘기를 해도 이미 주관이 개입된 생각이고 의견이다. 따라서 말을 하면 할수록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말 하기가 매우 조심스럽다. 특히나 남에게 조언이나 충고를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주관 속에서 판단한 생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무아(無我)의 체득이다. 무아는 연기(緣起)다. ‘나’가 없으면 ‘너’도 없다. 주관이 없게 되면 객관도 사라진다. 주관과 객관이 사라지면서 분별이 사라지고 따라서 갈등도 사라진다. 온 세상은 하나이다. 하지만 사람 수만큼의 세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각자 자신의 세상이 옳고 최고라고 주장한다. 분별로 인해 갈등이 발생하고 괴로움의 시작된다. 괴로움은 ‘자기’라는 집착에서 시작된다.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은 정견(正見)에서 시작된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안목, 바로 여실지견(如實知見)이다. 연기와 무아의 체득으로 정견을 확립하게 되면 여실지견이 저절로 드러난다.


“덧없는 몸이 세계라면, 나와 남을 갈라 보는 뿌리 깊은 습관(人我)은 산이라 할 수 있고,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는 번뇌는 금을 덮고 있는 광석 찌끼에 비유된다. 불성은 금이고, 그것을 되찾는 반야 지혜는 전문 제련사이며, 정진 용맹은 그 광석 찌기를 뚫고 깨는 일에 해당한다.” (‘붓다의 치명적 농담’ 본문 중)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동안거를 준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