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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둘레길은 '쉼'이다

by 걷고

오랜만에 청명한 날을 맞이하니 몸과 마음이 가볍다. 지난주에 비 맞으며 걸었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며 경기 둘레길 13코스는 시작된다.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는 기분이 다소 묘하다. 국유림 임도까지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나야 만 하는 길이다. 가끔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을 일상과 길에서 맞이한다. 그럼에도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것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취하려는 욕심과 집착 때문이다. 한번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은 어느새 익숙해져서 그런지 그다지 힘들지 않다. 내려올 때는 비를 맞으며 힘들게 걸었던 경사가 심한 길이었는데, 청명한 날씨에 이 길을 오르니 그다지 숨이 차거나 힘들지 않고 쉽게 오를 수 있다. 한번 지나간 길은 금방 익숙해져서 마치 옛 친구를 만난 편안함이 있다.

국유림 임도를 걷는 경기 둘레길은 걷기에 아주 좋은 길이다. 우선 길이 넓고 안전하다. 차바퀴가 만들어 놓은 두 개의 길 사이에 풀이 우뚝 자라 있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2열 종대를 유지하며 걷게 된다. 올라가는 길도 등산과는 다르게 완만한 경사로를 걷는다. 트레킹에 이만큼 좋은 길도 없을 것이다. 인적은 매우 드물고 숲은 조용히 우리를 맞이한다. 가끔 산새들이 우리를 반기며 지저귄다. 그 소리가 듣기 좋다. 이 길을 새벽에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한 길동무 얘기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네 명의 길동무와 걸으니 편안하고 오붓하며 즐겁게 걸을 수 있다. 발걸음도 가볍고 오랫동안 함께 걸었던 길동무들과 걸으니 걷는 속도도 비슷하고 서로 기다릴 필요도 없이 각자의 페이스대로 걸을 수 있다. 걷는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으니 훨씬 힘도 덜 들고 걷는 재미에 빠지게 된다.


완만한 경사가 계속 이어진다. 중간에 돌이 많은 길도 있다. 부상 위험 때문에 조심해서 걷는다. 좌측에는 철조망이 꽤 길게 이어져있고, 우리는 철조망 바깥에 난 길을 걷는다. 멧돼지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철조망이다. 매우 깊은 밀림에 들어온 느낌이 들 정도로 숲은 깊다. 끝날 듯 끝나지 않는 길 없는 길이 조금 지루하기도 하고 지치게 만든다. 만약 이 길을 혼자 걸었더라면 무서워서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는 길이다. 반대편에서 한 사람이 혼자 걸어 올라온다. 음악을 들으며 손에는 나무 지팡이를 하나 들고 유유자적하게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숲이 무성하고 풀이 많이 자라 길이 보이지 않는 길에서 사람을 만나니 반갑다.

임도길 중간에 또 임도를 내려온 후 도로를 따라 걷는 길 중간중간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있다. 지나가야 하는 길인데 가지 못하게 막고 있으니 어찌할 줄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뛰어넘어 걷는다. 막힌 길을 우리는 거침없이 걷고 있다. 덕분에 넓은 길은 우리들만의 길이 된다. 좌측에는 한탄강이 흐르고 있다. 한탄강과 우리가 걷는 길 중간에 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다. 그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길만 보면 걷고 싶다. 걷기 중독이고 길 중독인가 보다. 도착 지점인 중3리 마을회관에 와서 보니 이전에 왔던 곳이다. 이 마을회관 앞에서 스트레칭을 한 후 걸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길을 걸으며 어디를 걷고 있는지도 모르고 걷는다. 그냥 트랭글이 가르쳐 준 대로 따라 걷고 있다. 하지만 마치 퍼즐 조각이 완성되듯 서로 언젠가는 연결된다.

임도가 끝나는 지점인 지장 계곡에는 물놀이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편안한 휴식을 즐기고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 충전을 위한 ‘쉼’을 하고 있다. 우리는 늘 뭔가를 하는데 익숙해져 있고,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총에너지의 양은 10인데, 10 이상을 쓰기 위해 또는 더 짜내기 위해 몸과 마음을 괴롭힌다. 가족과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명분을 만들고 그 명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혹사시킨다. 이런 일이 반복되며 번아웃(소진)에 빠지게 된다.

“번아웃은 부정적인 스트레스의 극단적인 형태로 번아웃 신드롬에 빠지면 신체적, 정서적으로 극도의 피로감과 의욕 상실, 그리고 무기력증에 시달린다. 심하면 우울증에 빠지고 자신의 능력 없음을 탓하는 자기혐오마저 생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번아웃이 생각났다. 그들은 현명한 방식으로 번아웃이 오기 전에 또는 번아웃에서 탈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들의 물놀이와 우리들의 걷기가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걷는다. 각자의 일상에서 바쁘고 열심히 살면서 일주일을 기다린 후에 주말에 길을 걸으며 재충전한다. 번아웃에 빠지기 이전에 미리 충전하는 것이다. 완전히 방전되면 그만큼 충전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충전 자체를 거부할 수도 있다. 가끔 길동무들이 토요 걷기를 기다리며 한 주를 보낸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나 역시 한때는 그런 시절을 보냈던 적이 있기에 그 말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샘에 물이 채 차기도 전에 모두 사용해 버리면 나중에 필요할 때 쓸 마중물조차 없어진다. 물이 줄어들고 바닥이 보이기 전에 미리미리 채워야 필요할 때 요긴하게 쓸 수 있다. 모든 일에는 쉼이 필요하다. 쉬어야 샘에 물이 고인다.

지장계곡에 발을 담고 잠시 발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오늘 하루 5시간 이상 걷느라 수고해 준 발에게 주는 보상이다. 물이 차가워 채 1분조차 발을 담글 수 없다. 여러 번 물에 발을 담고 빼기를 반복하며 발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덕분에 우리도 걷는 것을 잠시 쉬어간다. 쉬며 체력을 회복하고 발에게도 휴식을 제공하며 남은 길을 걷는다. 오래가기 위해 ‘쉼’이 필요하다. ‘쉼’은 삶의 모든 과정에서 필요하다. 심지어 인간관계에서도 필요하다. 오랜 기간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너무 가까운 것보다는 가끔 거리를 두는 것도 필요하다. 인간관계의 ‘쉼’은 ‘거리두기’가 된다. 일 속에 파묻혀 살다가도 가끔 ‘쉼’이 필요하다. 일을 좀 더 효율적으로 수행하며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쉼’이다.

‘쉼’은 ‘멈춤’이 아니다. ‘쉼’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쉼’이 멈추면 ‘삶’이 멈춘다. 즐겁게 살아가기 위해서 적절한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하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일과 사랑이다. 나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고 싶다. ‘쉼’이다. 우리는 걸으며 쉬고, 앞으로 나아간다. 삶도 그렇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쉼이 필요하다. 일과 쉼의 균형을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몸과 마음의 소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자동경보장치다. 이 장치를 잘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도 ‘쉼’이 필요하다. 경기 둘레길은 ‘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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