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걷고 Aug 26. 2024

사띠 (Sati)

2,500년 전 인도의 한 지방 언어인 팔리어 사띠(sati)가 알아차림, 마음챙김, 새김으로 변역 되고 있고, 최근에는 주로 마음챙김이라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사티의 어원은 기억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이는 과거를 기억하는 의미가 아니고 현재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 학자들은 사띠, 즉 마음챙김을 아래와 같이 다양한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재의 순간에, 비판단적인 태도를 갖고, 의도적으로 주의를 집중하는 것 (Kabat-Zinn, 1990)

현재의 경험에 대한 주의 (attention)와 알아차림 (awareness) (Brown and Ryan, 2003)

지속적인 내적, 외적 자극의 흐름들이 일어날 때 비판단적으로 관찰하는 것 (Baer, 2003)

마음챙김은 늘 지금-여기에 깨어있음이다. 탈동일시다. (김정호, 2016)     


위의 표현을 살펴보면 사띠는 현재라는 시간적 개념, 경험이라는 자극, 자극에 대한 순수한 관찰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호흡을 통한 알아차림 mindfulness with breathing>의 저자인 붓다다사 비구는 감각 대상이 접촉하는 그 순간에 사띠가 바로 거기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감각 대상과 감각을 느끼는 감각 기관이 있다. 눈은 사물을 본다. 눈은 감각기관이고 사물은 감각 대상이다. 귀는 소리를 듣는다. 소리는 감각 대상이고, 귀는 감각기관이다. 감각기관을 갖고 있는 우리는 수많은 자극에 늘 노출되어 있다. 길을 걸으며 수많은 것을 보고 듣는다. 하지만 우리는 습관적으로 또는 건성으로 보고 들을 뿐이다. 그리고 보고 듣는 것에 따라 습관적으로 반응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보고 듣는 그 순간 사띠를 갖고 보고 듣는다면 있는 그대로를 보고 들을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반응은 무의식적이고 자동적 반응에서 선택적 반응으로 변화될 수 있다. 자동적 반응은 과거가 나를 이끌고 가는 방법이고, 선택적 반응은 현재의 내가 나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살아가는 방법이다.      


하나의 자극은 또 다른 자극과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현재의 자극과 반응을 바탕으로 그와 관련되거나 유사한 경험을 다시 불러일으키며 생각의 연결 고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사띠, 즉 마음챙김이다. 끊임없는 생각은 우리가 현재에 머무는 것을 방해한다. 따라서 현재는 사라진다. 과거가 떠오를 때 빨리 알아차리고 현재로 돌아오게 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과거의 노예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미래에 대한 망상을 하고 있는 것을 빨리 알아차릴 수 있다면 현재를 사라지게 하는 어리석은 행위를 멈출 수 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지 않는 생생한 지금-여기를 의미한다. 지난 과거는 변화시킬 수는 없다. 오지도 않은 미래 역시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현재를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미래는 만들어 나갈 수는 있다.      


사띠는 우리를 지금-여기에 머물게 만들어준다. 그 덕분에 우리는 과거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자신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사띠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사띠는 특별한 것이 아니고 매우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다. 식사를 하며 먹는 행위에 집중하는 사띠도 있다. 걸으며 걷기에 집중하는 사띠도 있고, 설거지하며 설거지에 집중하는 사띠도 있다. 호흡에 집중하는 사띠도 있다. 이들은 모두 몸을 통한 사띠에 해당한다. 그 외에도 감정을 알아차리는 사띠도 있고, 마음의 변화를 알아차리는 사띠도 있고, 삼라만상의 무상함과 무아의 본질을 알아차리는 사띠도 있다.      


지금까지 사띠를 현재라는 시간적 개념에서 얘기를 했다면 자극에 관한 순수한 관찰에 대해 얘기할 필요도 있다. 과거에 의해 판단을 내리거나 과거의 패턴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현명한 태도는 저절로 드러난다. 자극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어떤 판단이나 선입견 없이 지금 주어진 자극을 단지 받아들이고 느끼기만 하면 된다. 싫다고 밀어내거나 좋다고 끌어안을 필요조차 없어진다. 자극은 자극을 뿐인데, 자기(ego)가 활동하면서 자극에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자기(ego)의 주인은 과거다. 우리는 자기(ego)와 자아(Self)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오쇼는 “자기(ego)란 진정한 자아(Self)에 대해 만들어 놓은 가짜의 대체품으로 관념, 그림자로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자아(Self)는 있는 그대로 고요하게 주시하는 관찰자다. 외부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주인이다. 이런 방식으로 관찰하면 쓸데없이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 가며 자기(ego)가 원하는 대로 반응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미 모든 것은 완벽하다.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분별 망상으로 드러난 세상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꿈·환영·물거품·그림자와 같고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 같으니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마땅히 이같이 관찰하라             (금강경)     


자기(ego)가 활동하는 영역은 분별심과 망상이 가득한 세상이다. 분별은 나와 너를 구별하는 차별심이고, 망상은 헛된 생각들이다. 분별로 일으킨 모든 생각과 감정은 이미 오염된 것으로 진짜가 아닌 가짜 세상이다. 금강경에서는 이를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와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과거가 만들어낸, 또는 미래에 대한 망상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자기(ego)가 만들어 낸 세상에 반응하는 것은 무지한 짓이다. 마치 홀로그램에 나타난 상대와 권투 시합을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이때 사띠를 통해 일어난 망상을 바르게 바라보면 허상은 저절로 사라진다. 어떠한 판단이나 생각을 하지 않고 단순히 떠오르는 것을 바라만 보면 허상은 저절로 사라진다. 이들을 무찌르기 위해 이들과 씨름을 한다면 이놈은 더욱 강해지고 힘이 세질 뿐이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어둠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도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전원 스위치를 켜면 즉 밝음이 오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진다. 밝음은 어떤 생각과 판단도 없는 순수한 바라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오쇼는 “마음이 사라지고 생각이 사라지면 마음챙김, 완전히 깨어있는 자각이 생긴다.”라고 했다. 마음과 생각 역시 자기(ego)가 만들어 놓은 허상에 불과할 뿐이다. 사띠는 자기(ego)를 죽이고 자아(Self)를 회복하는 매우 중요한 방편이다. 사띠는 과거나 미래의 노예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다.    

  

사띠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말이 있다. “몸 있는 곳에 마음을 두어라”와 “몸은 바쁘게 마음은 고요히”라는 말이다. 몸은 현재에 머물면서 마음은 과거나 미래에 가있다. 걸으면서 밥 먹을 생각을 하고, 밥을 먹으면서 영화 볼 생각을 하고, 영화를 보며 숙제 걱정을 하며 살아간다. 지금-여기 몸이 있는 곳에서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사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어떤 일을 하든 집중해서 하면 잡념은 사라진다. 몸은 바쁘지만 마음은 한가롭고 여유롭다. 하지만 우리는 몸은 움직이려 하지는 않고 마음은 정신없이 여기저기 헤매고 살아간다. 몸과 마음이 한 곳에 머물며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띠이고 이것이 완벽한 하루를 살아가는 완벽한 방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행복의 열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