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걷기의 방해꾼일까? 아니면 걷기의 즐거움을 더해 주는 고마운 친구일까? 매일 같은 날씨라면 걷는 즐거움이 클까 아니면 적을까? 사람마다 또 각자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건강 상태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꾸준히 걸어온 사람으로서 날씨는 걷기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이 말은 어떤 날씨에도 걸을 수 있다는 의미다. 또한 다양한 날씨는 걷기의 즐거움을 더욱 크게 만들어 준다. 한 겨울에도 옷을 잘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서 걸으면 추위보다는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무더운 날씨에 걸으면 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기는 하지만 걸은 후 느끼는 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눈이 오는 날 걷는 즐거움은 말할 필요도 없고, 비가 오는 날 걷는 즐거움도 나름 운치 있고 멋지다. 한 가지 주의할 사항은 날씨에 맞는 준비를 잘하고 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꾸준히 걷는 사람들은 일기 예보를 늘 미리 살펴보는 습관이 있고, 걸으며 기상청 일기예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걷기도 한다. 준비한 만큼 즐길 수 있다.
아침 10시에 양재시민의 숲 역에서 모여 수서역까지 걷는 날이다. 원래 일기 예보는 오후 1시경 소나기가 올 예정이었는데 시간에 따라 예보가 변하고 있다. 오전 9시 조금 넘으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10시에 역에서 모여 각자 비를 맞을 준비를 하며 걷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우비를 쓰고, 어떤 사람은 우산을 쓰고 걷는다. 산길을 갈 때 늘 스틱을 사용하는 나는 우비가 편하다. 두 손이 편안해야 걷기에 편하다. 우중 걷기를 할 때 늘 고민이 된 것이 어떤 우비를 사용하느냐다. 우비를 쓰면 덥고, 우산을 쓰면 손이 불편하고, 비를 맞고 걷기에는 비가 제법 많이 내릴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지 늘 고민이었다. 작년에 할인점에서 싸게 구입한 우비가 있는데 입어보니 가볍고 덥지도 않고 편안하다. 이제 우중 걷기의 제짝인 우비를 만난 거 같아 기쁘다.
오늘 걷는 서울 둘레길 9코스인 대모-구룡산 코스는 서울 둘레길 코스 중 가장 좋아하는 길이다. 물론 서울 둘레길은 어느 코스든 모두 멋지고 좋지만 특히 이 코스는 더 정이가고 좋아한다. 산길이어서 그늘도 만들어주고, 두 개의 산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즐거움도 크고, 무엇보다 길 자체가 참 멋있고 기품이 있다. 길이 끝날 때쯤 되면 끝나는 것이 아깝고 아쉬워 발걸음을 조금 천천히 한다. 그만큼 걸어도 또 걷고 싶고, 걸으면서 계속 걷고 싶은 길이다. 산 입구에 들어서면서 30분간 침묵 걷기를 하며 발의 감각에 집중하며 걷는다. 비로 인해 땅이 부드러워지고 가끔은 진흙 길을 만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비 오는 날만 맞이할 수 있는 독특한 즐거움이다. 이 길을 매일 걷는다고 해도 이런 진흙길을 만나는 것은 일 년에 며칠 되지 않을 것이다. 일기일회(一期一會)다. 그러니 진흙길도 반갑다. 우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발의 감각에 집중하며 걷는다. 두 가지 감각을 동시에 느낄 수 없기에 다시 발의 감각에 집중하며 걷는다. 나뭇잎과 이름 모를 풀들도 비를 맞이하며 한껏 들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중 걷기를 그리워 비를 기다리고 있듯 이들도 비가 그리웠나 보다. 비가 내리며 안개를 만들어내고, 안갯속을 걸으며 우리는 신선이 되어간다. 약간 몽롱한 안개가 만들어주는 신비감 또한 우중 걷기의 즐거움이다.
지난주에는 물을 다섯 병이나 마셨는데, 오늘은 마시는 물의 양이 지난주에 비해 1/3 정도밖에 안 된다. 날씨와 물의 양은 상관관계가 있다. 하지만 날씨와 걷기와는 어떤 상관관계도 없다. 잠시 휴식 후 걸으며 이번에는 30분간 소리에 집중하며 걷는다. 우비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걷는 일은 색다른 경험이다. 마치 나만의 세계에 빠져 걷는 느낌이다. 가끔 저 너머에서 새소리가 들린다. 소리에 집중하며 걸을 때는 가까운 소리보다는 멀리서 들리는 희미한 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면 집중이 더 잘 된다. 가까운 소리에서 조금씩 멀리서 들리는 소리로 의식을 옮겨가며 청각에 집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길벗과 함께 걷지만 침묵 속에서 우비를 입고 우비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걸으면 마치 진공 속에서 홀로 걷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로 고요해지고 편안해진다. 어떤 것도 나의 침묵 걷기를 방해할 수 없다. 우비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나를 보호해 주는 방어막이 된다.
우중 걷기를 즐기게 되는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흠뻑 비를 맞고 걸었던 경험 덕분인 것 같다. 그 이전에는 비 오는 날 걷는 것을 싫어했다. 축축한 날씨에 몸은 땀에 젖고, 신발도 비에 젖고, 몸에 비 맞는 것이 싫었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며 세 번 큰 비를 맞았다. 우비를 쓰고 걸으려 해도 바람이 심해 우비가 뒤집힐 정도로 바람도 거셌다. 그래서 방수 점퍼를 입고 걸었다. 방수 점퍼는 가벼운 비 정도는 막아줄지 몰라도 큰 비를 맞으면 그 습기는 그대로 전달되고 옷이 비에 흠뻑 젖으며 방수 기능을 상실한다. 그냥 일반 점퍼를 입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엄청난 비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며 나의 길을 막으려 했다. 이미 돌아갈 수도 없는 길이고, 막 지나쳐 온 지역의 알베르게는 빈 방이 없어서 한 코스를 더 걸어야만 했다.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하고 낮 시간임에도 저녁처럼 어둡다. 무서웠다. 하지만 멈춰서 있을 수도 없는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등산화 밑창이 덜렁대며 신발과 분리되기 직전이다. 땅은 진흙길이어서 걷기가 불편했다. 어떻든 그렇게 해서 찾아든 곳이 지도에도 없는 이태리 신부님이 운영하는 알베르게였다. 그날 밤 세족식이라는 거룩한 의식을 받았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로 불을 밝히는 식탁에서 멋진 만찬을 포도주와 함께 즐길 수 있었다. 마치 과거로 여행 온 느낌이었다. 그날의 경험이 우중 걷기를 그립게 만든다. 그 이후 비를 즐기며 맞을 수 있었고, 더 이상 우중 걷기는 싫어하는 걷기가 아닌 오히려 가장 좋아하는 걷기가 되었다. 비 오는 날 일부러 집에 있다가도 우산을 쓰고 샌들을 신고 비를 맞으러 나가서 걷기도 한다. 나가면서 설레고 기분이 좋아지고, 걸으면서 저절로 콧노래가 난다.
서울 둘레길을 걸으며 오랜만에 참다운 우중 걷기를 즐겼다. 함께 걸은 길벗들의 웃는 얼굴을 보며 이들도 우중 걷기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친구가 뒤에서 ‘멋있다!’라고 외친다. 걷는 자신과 우리의 걷는 모습이 멋있게 보였던 것 같다. 금요일 오전이어서 그런지 인적이 드물어서 길은 여유롭고 한산하다. 가끔 삼삼오오 걷는 사람들을 만난다. 맨발 걷기를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 모습도 보인다. 이 길 끝나는 지점에는 맨발 걷기에 좋은 장소이고, 맨발 걷기 체험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는 플래카드도 걸려있다. 비 오는 날 맨발로 땅의 감촉을 느끼며 걷는 재미도 무척 클 거 같다. 요즘 둘레길을 걸을 때마다 맨발 걷기를 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이들이 단순한 건강 위주의 걷기에서 마음까지 챙길 수 있는 걷기를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우중에 맨발로 걸으며 발의 감각에 집중해서 걸으면 우중 걷기의 즐거움이 배가될 수 있을 것이다. 몸과 마음의 균형과 건강을 동시에 챙길 수 있는 것이 마음챙김 걷기다. 특히 비 오는 날은 마음챙김 걷기를 하기에 매우 좋은 날씨다. 비 오는 멋진 날 멋진 길을 멋진 길벗과 함께 걸으며 멋진 하루를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