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 하나에 모든 것을 내걸다.
스포일러: 약함
인간은 결코 이성적인 동물이 아니다. 인간이 감성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성적인 일이다. 무수한 규칙과 규정과 법 속에 살고 있지만 두 갈래길 앞에 인간의 선택은 대부분 감정에 기반한다. 가령 아침 식사부터 저녁 취침까지를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원칙주의자들이 모여있는 집단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허다하게 발생한다. 규정과 법의 모호성 때문이다. 그럴 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행위야말로 인간이 감성적임을 증명하는 길이다. 내면적 원리로 작용하는 것들은 정해진 규정이 없고, 규정이 없는 선택은 감정적인 호소에 너무나도 취약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이성적인 동물이 되기를 꿈꾼다. 혹은 스스로가 이성적이라고 착각한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진정한 이상적인 인간임을 증명해준다고 여기면서.
<미스 슬로운>은 승률 100%의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슬로운의 총기 규제와 관련된 한 일화를 다룬다. 시종일관 시니컬하고 냉철한 슬로운은 영화에서 철두철미한 이성적 인간으로 묘사된다. 그녀에게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는 듯하고 그녀의 선택은 늘 옳은 듯 보인다. 그렇다면 슬로운은 스스로가 이상적이기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각광받고 있을까? 스포트라이트는 화려하게 쏟아지지만 경외심 앞에 부러움은 온데간데없다. 오히려 그녀의 주변에는 뒷담화를 하거나 면전에서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녀의 로비 방식이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슬로운은 결코 그들에게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 그들은 단순한 감정에 호소하는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로비스트로서 자신의 업무에만 사로잡혀있는 그녀는 진정한 워커홀릭이다.
*로비스트; 특수한 집단의 이익 추구를 위하여 일정한 대상의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펼치는 사람
그렇다면 슬로운이 평범한 삶을 모두 포기하면서까지 로비 일에 사로잡혀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녀의 모습은 불의의 세상과 홀로 맞서 싸우는 영웅처럼 보이기도 하고, 신념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는 시위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신념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교묘한 트릭들 속에서 점차 모호해지기 시작하다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 결국 슬로운은 그저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승리에 집착하는 욕망의 소유자처럼 여겨지기 시작한다. 어쩌면 로비스트라는 이름의 그녀야말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을 말이 되게 만드는 간사한 ‘쥐’**일지도 모른다. 목적을 위해 주변 사람들을 이용하는 모습과 결코 합법적이지 못한 수법들을 목격하며 관객은 슬로운이라는 주인공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오로지 승리만을 거머쥐기 위한 슬로운의 목적 추구는 과정의 중요성을 내내 간과한다. 그녀는 도무지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는 법을 몰랐으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지탄들을 뒤로한 채 필요한 부분에 필요한 사람을 서슴지 않고 시기적절하게 이용했다. 결국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슬로운에게서 등을 돌리고 떠나간다. 이제 그녀는 대인관계를 소비해가며 일궈낸 모든 성과들과 이제까지의 커리어를 내걸고 상원 의회의 재판관 앞에 앉아있다. 그녀에게 잔존하는 트릭이 있을까. 약점을 거머쥐고 있는 포드가 증인으로 나서는 걸 보면 그녀의 운명은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다. 재판관의 수 차례의 질문에 계속해서 묵비권을 행사하던 그녀가 마이크 앞에서 드디어 입을 열기 시작한다. 그녀의 굳건한 이성에 균열이 이는 순간이자 신념과 욕망이 좌절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여기서 당신은 영화의 제목이 <미스 슬로운>이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쥐(Rat); 미국 정치계의 탈당자, 배반자, 비열한 자, 파렴치한을 지칭하는 속어로서 주로 사용된다.
감성적인 인간은 늘 이성적인 사고를 꿈꾼다. 신념이라는 것은 나약한 인간이 나약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만들어낸 삶의 기준이자 가드라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완벽하다고 할 수 없는 그 기준을, 나아가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규정과 규칙과 헌법을 신뢰할 수 있을까? 도덕적 평가와 윤리적 잣대는 또 어떠한가? <미스 슬로운>은 한 명의 로비스트를 통해 사회 전체의 기준점을 흔들어버린다. 신뢰를 상실한 세상에서 그녀의 정체는 선과 악 중 무엇인가. 그녀는 신념을 지켰는가, 버렸는가. 그녀는 승리자인가, 패배자인가. 필자는 다만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부패한 세상 앞에 수단으로써의 도덕적 타락은 용인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스 슬로운처럼 5년이라는 기간을 기꺼이 홀로 감수할 의향이 있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