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휘남 Jun 02. 2019

다름 아닌 가족 영화

황금종려상 수상작 <어느 가족> <기생충> 속 ‘작은 사회’

스포일러: 강함



 어느 날의 새벽 네 시. 칸 영화제에 참석한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영화사에서 반년 정도 같이 근무한 선배였다. 거두절미한 새벽녘의 문자에는 ‘봉준호 황금종려상 수상!!!’이라고 쓰여있었다. 나는 그날 오랜만에 해 뜨는 걸 보았다.


 칸 영화제가 봉준호 감독을 선택했다. 후보 중에 쿠엔틴 타란티노도 다르덴 형제도 있었고 ‘칸의 총예’ 자비에 돌란도 있었다. 한국에선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유럽에서라면 얘기가 조금 다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영화길래! 개봉 후 극장에서 만난 <기생충>(2019)은 봉준호 감독 최고작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칸의 선택을 받은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문득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2018)이 떠올랐다. 최근 2년 간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작품들은 모두 다름 아닌 가족 영화였다.




 <어느 가족>과 <기생충>을 보면서 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1922) 속 노파의 모습을 떠올렸다. 소설 속에서 노파는 가발을 만들기 위해 인간의 사체에서 머리카락을 떼내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각박한 헤이안 시대 말기였으므로 노파의 행동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로는 판단할 수 없는 ‘생명으로서의 본능’ 즉 ‘생존 본능’이었다.


전원 백수로 살아가는 기택(송강호) 가족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가 정당화되는 세상. 그런 세상의 경지 속에 ‘기생충’이 된 ’어느 가족’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가족>과 <기생충>은 각박한 세상 속에서 어떠한 도덕적 잣대로도 판단되지 않는 존재들의 이야기다. 두 영화의 관객은 작중 인물의 행동을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건 영화가 도덕적으로 몰락한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 ‘몰락하게 만든 사회’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영화는 정말 개인의 도덕적 몰락에는 관심이 없을까? 이를 설명해주는 것이 작중 인물 기우(최우식)와 쇼타(죠 카이리)의 모습이다. 기택 가족의 장남 기우는 자신의 계획을 ‘위조나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인물인 반면, 쇼타는 주인이 있는 물건에 손을 대는 오사무(릴리 프랭키)에게 ‘이건 누군가의 물건이잖아?’하고 반발하는 인물이다. 쇼타와 기우는 ‘죄’에 대해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고 도덕적으로 옳은 인물은 쇼타지만, 영화의 후반부에서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오히려 기우 쪽이다. 도덕적으로 우수한 쇼타는 다리를 다치고 경찰에 붙잡힌다. 이들 영화가 도덕적인 영화였다면, 긍정적인 인과 관계는 기우가 아닌 쇼타의 몫이었다는 말이다. 


타인으로 구성된 어느 가족의 모습

 엔딩에 다다르면 도덕적 규범에 익숙한 관객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성공한 사람이 되겠다는 기우의 표정은 어째서 밝거나 야심 차지 않은가? 도덕적으로 옳은 판단을 한 쇼타의 삶은 어째서 행복하지 못한가? <어느 가족>과 <기생충>은 좋은 영화를 말할 때 흔히 표현하는 ‘영화가 끝나면 비로소 시작되는’ 영화다. 곱씹어볼수록 해결할 수 없는 작중 인물의 상황은 관객에게 무기력을 안기기까지 한다(기우의 진심어린 다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가 저택을 살 정도로 부자가 되지 못할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관객의 힘이 나약해서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두 영화는 개인이 아닌 사회에 포커스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봉준호 감독이 제기하는 이 사회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인가. 이를 전면으로 이끌고 나와 구도적으로 표현하는 쪽은 봉준호 감독이다. 감독은 앞서 <괴물>(2006)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이번 신작에서도 지상과 지하의 상하 구도로 세상을 향한 본인의 시각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이번 영화의 처음 씬부터 마지막 씬까지 모든 카메라 워크에 내재되어 있다. 파티에서 입을 옷을 꺼내기 위해 팔을 ‘위로’ 뻗는 연교(조여정)와, 체육관 바닥에 널린 옷을 뒤적이기 위해 팔을 ‘아래로’ 뻗는 홍수 피해 난민들의 모습만 보아도 봉준호 감독 특유의 상하 구도는 명확하다.


박사장 댁으로 향하는 반지하방 신세 기우

 봉준호 감독의 상하 구도와 더불어 두 영화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는데, 박사장(이선균)과 연교는 기택 가족에게서 반지하방의 냄새를 맡으며, 쇼타와 오사무 가족은 스미다 강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를 듣는다.


 불쾌함을 전하는 부정적인 냄새와 기쁨을 전하는 긍정적인 소리. <기생충>과 <어느 가족>에서 냄새와 소리는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뚜렷하게 체감되는 현대 사회의 계급을 상징하는 것들이다. 상위 계급이 하위 계급에게 느끼는 불쾌함과 하위 계급이 상위 계급에 느끼는 동경심, 그리고 그런 감정을 양산하게끔 이미 구분되어 버린 사람과 사람의 위치에 대해서 두 감독은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나 사회적 약자의 문제를 대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오해와 몰이해를 표현하는 <어느 가족>의 엔딩은 정말이지 대사 하나하나가 소름 돋을 정도다.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마주한 동등한 계급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속에 머물며 정당화되던 행위는 미디어를 통해 대중이라는 큰 사회로 나아가면서 사회적 문제로 전락해버린다. 거기에는 도덕적으로 우수하면서도 생존할 수 있는 절대 다수의 상위 계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생존 본능’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보다 앞서 있던('기생충'이 된) 하위 계급('어느 가족')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전락한다.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작중 인물들은 그 시점에서 생동감을 잃는다. 가족이라는 작은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나마 동등했던 계급. 이것이 <어느 가족>과 <기생충>이 가족 영화 형식을 취한 이유다.




 빈부는 점차 벌어지고 소외는 갈수록 커진다. 흔히 ‘기득권’이라 부르는 그 위치에서 두 감독이 일반 관객에게 선사한 문제 제기가 고맙고 또 놀랍다. 기택이 도망치는 장면에서 봉준호 감독이 택한, 마치 신이 인간을 내려다보는 듯한 직부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밤이다.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지금의 위치에 감사를 표하며, 지금 내가 나 아닌 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이전 01화 청춘은 찌질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