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휘남 Jun 04. 2017

청춘은 찌질하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에 담긴 실상

스포일러: 보통



 청춘의 이미지는 눈부시고 찬란하다. '푸를 청'에 '봄 춘'이라는 단어 그대로 싱그러우며 아름답다. 젊음이란 계절처럼 돌아오는 것도 아니어서 더욱 소중하고 값지다. 그래서 사람들은 젊음을 최대한 연장하고 그 끝을 가능한 유보한다. 모두의 부러움을 사며 로망의 대상이 되는 청춘은 '인생의 황금기'임에 분명해 보인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교환과 성환은 청춘의 끝에 서있는 젊은이들이다. 이들은 애인도 있고 꿈도 있으며 이태리 유학 경험마저 있다. 생기를 잃지 않는 두 청년의 외면은 푸른 봄철이라는 청춘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듯하지만, 영화는 이들의 심연에서 전혀 다른 모습을 포착한다.


https://youtu.be/7y-eps3O-Ko

구교환 X 이옥섭의 단편영화, <플라이 투 더 스카이> (2015)

 교환은 '자차'가 아닌 ‘여친차'를 몰았고, 근사해 보이던 차는 시동조차 걸리지 않았다. 성환은 공부를 마쳐서가 아니라 꿈을 포기했기 때문에 이태리에서 돌아왔고, 교환은 꿈보다 당장의 일자리를 구해줄 자격증이 더 중요했다. 성환은 그런 교환을 따라 자격증을 따려고 귀국했다. 청춘의 꿈을 함께 피우던 이들은 꿈을 저버리는 순간에도 함께했다. 


 어른들은 늘 꿈을 강조했지만, 깨지고 다치고 무너지는 것은 언제나 자기 몫이었다. 원래 다 그러면서 크는 거야, 라는 위로도 충고도 아닌 말은 나약한 초년생을 속 시원히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아픔을 당연하게 여겼고 아무도 위로하려고 들지 않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했다. 그러나 청춘도 쉬고 싶었고 여유를 가지고 싶었다. 청춘의 열정은 가지고 싶어서 가지는 게 아니라 가져야 하기 때문에 가지는 것이었는데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철거 이전 노량진 육교의 모습

 2015년 10월 17일, 노량진역의 35년 된 육교가 흔들린다는 이유로 철거되었다. 미래를 준비하던 사람들은 동서남북을 가르던 기준이 사라지자 당연하던 방향 감각마저 잃고 말았다. 그 길 위에서 교환과 성환은 더 이상 건너갈 수 없는 건너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길을 찾는 것이었다. 성환은 자격증을 따기 위해 운전대를 잡고서, 자칫하면 가라앉을지도 모르는 부두의 선착장을 위태롭게 전진했다. 사실 그는 브레이크조차 제대로 밟을 줄 몰랐다.


 성환은 하고 싶은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말,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삼으라는 말, 취직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모두 귀담아들었고 몸소 실천했다. 꿈 대신 돈을, 환상 대신 현실을 택했다. 현실과 타협하는 법을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열등감과 열패감은 여전했다. 모두가 아름답다고 했지만 정작 청춘 무렵의 자신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그 무렵엔 뭐든 할 수 있다고 했는데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선착장에서 함께 끼니를 떼우는 성환(좌)과 교환(우)

 그래도 다행이었다. 성환에겐 같은 처지의 동지 교환이 있었다. 근무 중이던 성환은 오랜만에 교환의 연락을 받았다. 외로웠던지 얼른 반갑게 안부를 물었다. 타협을 외치던 후배는 어느새 꿈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성환은 문득 꿈을 접은 것이 후회됐다. 자신이 실패한 인생처럼 느껴졌다.


근데 육교는 원래 흔들려야 돼.
안 그럼 부러져.


 차갑게 발화된 이 한 마디는, 그러나 너무나도 따뜻했다. 청춘들은 목적지로 향하는 길 위에서 수 차례 흔들렸지만, 그럴 때마다 어른들은 흔들려도 괜찮다는 위로보다 다른 길을 찾으라는 조언을 했다. 매체와 서적에서 쏟아지는, 이상적이고 성공적인 '꿈의 플롯'에 익숙하던 청춘들은 흔들려도 되는 줄 몰랐다. 오히려 그 흔들림이 꿈에 대한 적성과 재능의 부족을 증명한다고 여겼다.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이 꿈의 차선책을 선택했다. 그리고는 젊은 날의 꿈을 배반한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

청춘 모두가 푸른 봄철을 거머쥐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청춘의 허기를 인정해야 한다. 이 글은 위로를 구걸하기 위해 쓰인 글이 아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젊은 날의 허상(虛像)에 사로잡힌 채 청춘을 미화했고, 우리는 거기에 강박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대학가에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포기할 항목은 갈수록 늘었는데, 기대치를 충족하기 위해 우리는 아름다워져야 했고 태연한 척해야 했다. 그러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남들이 다 하는 문화생활은 나도 즐겨야 했고, 남들이 다 가는 유럽여행은 나도 가봐야 했다. 흔들림은 진폭이 크지 않았는데도 크게 느껴졌고, 결국 우리는 목적지로 향하는 또 다른 육교를 철거했다. 그렇게 타인의 시선보다 중요한 무언가를 허무하게 놓쳐버렸다.




 추억이 사실과 상당 부분 다르듯 실제 청춘의 삶은 그들의 감상적인 말들보다 훨씬 비참하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성환과 교환처럼 패스트푸드로 때우는 간단한 식사조차 방해를 받는 것이 청춘이다. 이루어낸 것보다 이루어야 할 것이 더 많고, 안정적인 것보다 불안정한 것이 더 많아, 흔들리고 불안한 게 당연하다. 그 당연함이 부정당하고 외면받는 사회 속에서, 청춘의 삶은 더더욱 고달프기만 하다. 그러니 나라도 속 시원히 인정해야 한다. 청춘은 원래, 찌질하다고.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 위키미디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