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가장 가까운 이야기, <아이 앰 히스 레저>
스포일러: 약함
영화사적으로 가장 의의가 있는 해를 뽑으라고 한다면 그중 하나는 1955년일 것이다. 1955년은 마릴린 먼로가 지하철 격자창 위에서 치맛바람을 붙든 채 곤란하게 미소짓고, 제임스 딘이 부모의 압박에 목청껏 소리를 높여 반항을 한 해다. 이제 그 연도는 억겁을 장식하는 무수한 페이지 중 하나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많은 관객들이 그 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유 없는 반항>의 개봉을 한 달 앞둔 1955년 9월 30일, 제임스 딘은 자동차 사고로 24세의 젊은 나이에 돌연 세상을 떠났고, <7년 만의 외출>을 통해 섹스 심벌로 부상한 마릴린 먼로는 추문을 견디지 못하고 36세에 자살을 택했다. 그들의 생은 너무나도 유한했다. 그러나 유한했기 때문에 영원히 젊은 모습으로 회자될 수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제임스 딘의 레드 블루종과 마릴린 먼로의 화이트 드레스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히스 레저(1979-2008)는 <파르나서스 박사의 상상극장>(2009)의 촬영을 끝마치지 못한 채 약물 오용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여덟. <다크 나이트>(2008)에서 조커 연기로 쾌거를 이룬 그는 제임스 딘, 마릴린 먼로와 마찬가지로 전성기 시절에 죽음을 맞았다. 이제 우리는 히스 레저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아이 앰 히스 레저>의 개봉에 앞서 그의 몇몇 작품들을 되짚어보자.
△ 왼쪽부터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이유 10가지>, <기사 윌리엄>, <카사노바>
히스 레저는 ‘세기의 반항아’로 불리는 제임스 딘의 계보를 잇는 듯 보인다. 말하자면 그는 21세기의 반항아다. 하이틴 영화로 스타덤에 올랐던 히스 레저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999)에서 암거래 조직의 요원이자 감옥에 다녀온 전과자라는 흉흉한 소문을 가진 아웃사이더 패트릭 역할을 맡았다. <기사 윌리엄>(2001)에서는 귀족사회의 위계질서에 대항하는 지붕 수리공 윌리엄을 연기했으며, <카사노바>(2005)에서는 18세기 베니스 기독교인들을 육체적 쾌락과 회의론에 젖게 만든 방탕한 바람둥이 카사노바를 연기했다. 영화 속에서 그는 어딘가 이단아적이고 반사회적인 행보를 이어왔다. 그리고 이러한 행보는 <다크 나이트>의 잭 니콜슨을 능가하는 조커 역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는 언제나 정론(定論)에 반대하고 권위에 투쟁하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질서를 재정립하는 역할이었다.
△ <독타운의 제왕들>의 스킵 잉브롬과 <브로크백 마운틴>의 에니스 델 마
<브로크백 마운틴>(2005)은 히스 레저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도 그의 배우로서의 잠재력을 가장 잘 보여준 영화다. <독타운의 제왕들>(2005)에서 술과 담배에 찌든 건달 행세의 스킵 잉브롬을 연기하던 히스 레저는 정반대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과묵하고 마초적인 인물 에니스 델 마를 연기 하였는데, 당시 두 영화 사이의 촬영 공백기는 고작 7일에 불과했다. 히스 레저는 이 영화로 77회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63년을 배경으로 대자연 속 두 남자의 사랑을 다룬 영화는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1997)와 함께 퀴어 시네마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영화로 꼽히고 있다.
<아임 낫 데어>(2007)는 미국 역사상 가장 전설적인 포크락 가수 밥 딜런의 자아를 7개로 분류하고, 각각의 자아를 저마다 다른 배우에게 맡긴 채 이야기를 진행한다. 독특한 연출 방식으로 진행된 영화는 히스 레저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안겼는데, 실제로 그는 2007년 11월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아임 낫 데어> 촬영 중에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크리스찬 베일, 케이트 블란쳇, 리차드 기어 등 영화계의 대배우들과 함께한 영화에서 그는 뮤지션으로서 주목을 받은 딜런의 이면 로비를 연기했다. 작중 로비는 앞선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사회 현상에 배척적이고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히스 레저의 모습은 단연 조커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야심작이기도 했지만, 광기마저 어려있는 조커의 매력은 배트맨조차 견줄 바가 못되었다. <다크 나이트>는 정의라는 이름으로 꾸며진 부패한 정당성과 본능을 따르는 악의 타당성의 균형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진행 과정 내내 두 개의 선택지로 나누어진 채 관객으로 하여금 해답을 자문하게 만든다. 정의로운 히어로인 줄로만 알았던 배트맨은 애인을 죽인 조커를 잡기 위해 비윤리적인 행동에 가담하고, 악인인 줄로만 알았던 조커는 돈을 불싸지르고 정의를 논한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비번(非番)을 말하는 형사와 기폭장치를 던지는 죄수를 바라보며 정론에 익숙하던 관객은 정답을 찾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다.
히스 레저의 사망 소식이 전해진 직후의 작품이었던 만큼 많은 미디어에서 그의 죽음과 조커를 연관 지었는데, 촬영을 위해 캐릭터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는 기정 사실화되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그 어느 배역보다 극적인 연기를 선보여야 했던 만큼 많은 대가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며 저마다의 버전으로 히스 레저의 죽음을 거론했다. 그러나 조커의 분장을 맡았던 메이크업 아티스트 존 카글리온 주니어(John Caglione Jr)와 허핑턴포스트의 인터뷰 내용은 이와 사뭇 달랐다. 그는 언제나 장난기가 가득했으며 한 번도 위태로워 보인 적이 없었다는 것. 그렇다면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미국의 케이블 채널을 통해 이미 한 차례 공개된 바 있는 다큐멘터리 필름 <아이 앰 히스 레저>는 매스컴을 통해 히스 레저의 소식을 접할 수밖에 없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들은 감독의 페르소나로써 존재하는 배우 히스 레저는 알았지만 하나의 인생을 살아온 인간 히스 레저는 몰랐다. 사실 관계를 증명하기에 앞서 이 영화는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났고, 현장에서는 어떤 배우였으며, 가족에게는 어떤 아버지이자 남편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분명한 것은 그가 낙천적이고 장난기 많은 성격의 사나이였다는 것,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소유한 '야생마'이자 남다른 창의력으로 똘똘 뭉친 '예술가'였다는 것, 무모한 도전을 서슴지 않는 불나방이자 활활 타오르는 매력적인 불꽃이었다는 것이다. 영화를 통해 히스 레저라는 한 명의 인간을 만나는 순간, 미디어가 낳은 루머의 루머의 루머를 당신은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