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리 젠킨스의 모든 차별에 관한 <문라이트>
"The most disrespected person in America is the black woman.
The most unprotected person in America is the black woman.
The most neglected person in America is the black woman."
이것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 맬컴 엑스(1925~1965)가 연설 도중에 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최근 팝스타 비욘세가 음반 샘플로 사용하면서 세상에 다시금 나타나게 되었죠. 비욘세는 연설의 내용대로 '무례한 사회 속에 무방비하게 방치된 흑인 여성'을 위해 투쟁하는 아티스트입니다. 얼마 전 있었던 그래미 공연에서도 그녀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결코 구속될 수 없었던 당신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를 표현하면서요.
임진모 음악평론가는 미국의 권위적인 시상식 ‘그래미 어워즈(Grammy Awards)’가 수상을 하는 가수와 무대 공연이 주어지는 가수가 분리되어 있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제'와 같다고 말합니다. 단순히 수상자만을 조명하지 않기 때문에, 후보에 오른 모두가 동등하게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바로 그 모두를 위한 그래미가, 또다시 유색인종 차별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미는 올해도 어김없이 백인 아티스트들의 손을 들어줌으로써 기록적인 기록들을 세웠죠. 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이 보이콧을 시행 중인 지금 차별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스포일러: 강함
영화 <문라이트>의 주인공 샤이론은 또래와 다를 바 없이 성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을 가진 아주 건강한 소년입니다. 다만 조금 왜소할 뿐이죠. 평범한 이 아이에게는 조금 특별한 면이 있기도 한데, 그 차이는 곧 차별로 이어집니다. 샤이론은 다치는 줄도 모르고 활기차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들판에서 결국 따돌림을 당하죠. 자신의 어딘가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소년은 아직 알 수 없는 일들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질문을 던집니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은 이 아이를 사람들은 그저 체구가 작다는 이유로 ‘리틀(Little)’이라고 부릅니다.
카 오디오의 ‘Every Nigga Is A Star’와 함께 영화는 플로리다 주의 리버티시티를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문라이트>의 대부분은 겉과 속이 다릅니다. 평화로워 보이는 동네는 마약 밀매자 후안의 밀매 장소로 묘사되고, 마이애미 부근의 아름다운 경치와 화창한 날씨는 리버티시티 주민들과 전혀 무관한 듯 보이죠. 들판에서 신나게 공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사실 변변한 공조차 갖고 있지 못하고, 가정으로부터 보호를 받는 듯하던 샤이론은 마약에 중독된 어머니 파울라에 의해 늘 어질러져있는 집에서 살고 있죠. ‘자유(liberty)’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리버티시티는 세상 어딘가에서 내몰린듯한 흑인들이 모이고 고여 조성한 마을입니다.
영화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샤이론의 성장기를 보여줍니다. 1부 ‘Little’은 사람들이 정한 자아 속에서 방황하는 샤이론의 모습을 그리며, 2부 ‘Chiron’은 자아 정체성을 찾는 과정을, 3부 ‘Black’은 찾아낸 자아를 외면하는 모습을 담아냅니다. 각각의 타이틀은 모두 샤이론을 부르는 호칭으로서 사용됩니다.
파괴된 가정 속에서 자라온 리틀은 아이들에게 쫓기다 우연히 후안의 밀매 장소를 침입합니다. 후안은 자신의 구역에 들어온 꼬마에게 관심을 보이지만, 리틀은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아요. 후안은 패스트푸드점에 리틀을 데려가 모든 일을 낙관하며(‘It’ll All Be Over’) 음식을 먹입니다. 어른의 손을 덜 탄 이 과묵한 아이는 가스렌지로 물을 데워 스스로 목욕을 할 줄도 알지만, 아직까지는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후안에게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샤이론은 그러나 테레사를 만나면서 마음을 열기 시작합니다. 샤이론과 테레사는 알게 모르게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파울라(샤이론의 어머니)가 그러듯 별명 대신 본명으로 샤이론을 부르죠. 파괴된 가정 속에 방치된 샤이론에게 테레사는 사랑과 자부심의 울타리가 되어 줍니다. 한편 후안은 마이애미의 해변 한복판에서 세상을 헤엄쳐나가는 법을 가르쳐주죠. 테레사가 샤이론의 어머니 자리를 대신한다면, 후안은 아버지 자리를 채워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약에 찌들어 점점 처참해져 가던 파울라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아들을 향해 쳐다보지 말라며 윽박을 지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파울라를 그렇게 만든 사람은 바로 후안이었습니다. 사실을 확인한 샤이론은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후안은 죄책감에 빠집니다. 샤이론과 후안의 관계는 그렇게 끝을 맺습니다.
샤이론은 모두가 앞으로 갈 때 홀로 뒷걸음질 치는 16살이 되었습니다. 모두에게 리틀로 불렸던 그는 여전히 팔다리가 가늘고 왜소합니다. 들판의 아이들을 공을 차지 못하는 리틀에게 주목하도록 만들었던 테럴은 고교생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샤이론에게 시비를 걸고 성적인 모욕감을 줍니다.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고 가정에서는 억압을 받는 샤이론은 길가에서 정처 없는 괴로운 밤을 보내다 후안에게 수영을 배웠던 바다를 찾고, 거기서 우연히 케빈을 만납니다.
케빈은 언젠가 샤이론이 꾸었던 성적인 꿈속의 주인공이었죠. 여성이 아닌 남성의 모습이 부각되어있던 그 꿈 말입니다.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샤이론은 케빈의 해변에서 찾아냅니다. 정체성을 발견한 그는 ‘리틀’에서 벗어나 진정한 ‘샤이론’이 됩니다. 샤이론은 케빈 앞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웃을 수 있었지만, 그의 정체성이란 모두가 모욕하는 대상이자 사람들로부터 숨겨야 할 치부였으므로 샤이론은 사과를 합니다.
케빈은 어렸을 적부터 샤이론이 모두의 표적이 될 때마다 시선을 분산시키고 그를 반기던 유일한 친구였죠. 들판에서 케빈은 샤이론에게 충고를 했었습니다. 자신을 표적으로 삼는 그들에게 본떼를 보여주라고,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라고 말이죠. 테럴이 또 한 차례 궁지로 몰아넣자 샤이론은 케빈의 말대로 자신의 거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세상은 샤이론이 아닌 그들의 세상인 것만 같습니다. 학교 위원은 샤이론을 비난하고 경찰은 샤이론을 잡아갑니다. 이제 막 찾은 샤이론의 자아는 그렇게 소년원에 갇혀버리고 맙니다.
Goodie Mob의 ‘Cell Therapy’과 함께 마지막 챕터가 시작됩니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피어싱과 프론트(치아에 끼우는 금속 악세사리)를 끼운 채 금목걸이와 금시계를 찬 샤이론의 모습은 마치 후안을 보는 듯합니다. 강인한 육체와 옆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Play That Funk’) 인상 속에 리틀로 통하던 왜소함은 온데간데없죠. 전형적인 흑인 갱스터의 모습을 한 그는 이름보다 ‘블랙’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를 선호합니다. 총을 가까이 둔 채 살아가는 길거리의 마약상 샤이론. 파울라는 이 모든 게 자신의 탓인 것 같아 까맣게 타들어가는 심정입니다. 자신의 담뱃불도 붙이지 못하는 어머니 앞에 샤이론은 언젠가 후안이 말했던 회환의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습니다.
케빈은 주크박스의 노래에서 샤이론을 떠올리고 테레사에게 번호를 알아내 전화를 겁니다.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오면 맛있는 음식과 함께 그 노래를 들려주겠다고 약속하죠. 그 시절을 잊고 지내던 샤이론은 통화 후 케빈의 꿈을 꾸고 몽정을 합니다. 어머니를 뵙고 오는 길에 샤이론은 케빈의 식당으로 향하고, 남다른 의미를 가진 플로리다의 해변도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됩니다. (‘Cucurrucucú Paloma’)
전형적인 흑인 남자(‘Classic Man’) 샤이론은 케빈의 식당 문을 열고 한 걸음 더(‘One Step Ahead’) 나아갑니다. 요리사가 된 케빈은 제법 자신의 삶을 구축한 듯 보입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보람 있는 직업을 가졌고, 사만다라는 여성과 자식도 낳았죠. 케빈이 보기에 샤이론은 너무 많이 변해버렸습니다. 기대하던 샤이론의 모습은 그 자리에 없었어요. 그 사건 이후 샤이론은 자아를 잃었고, 남은 것은 지인들에게 숨기고 싶은 현실뿐이었습니다. 케빈이 프론트를 지적하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홀로 앉아있던 샤이론에게는 16살 무렵의 파도 소리가 들려옵니다. 샤이론에게 바다란 후안으로부터 인생을 배운 공간이자 케빈으로부터 자아 정체성을 발견한 공간이죠. 케빈은 자신의 향수를 불러일으켰던 그 노래 ‘Hello Stranger’를 샤이론에게 들려줍니다. 노랫말대로 이들은 정말이지 낯선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바바라 루이스, 아레사 프랭클린, 카에타누 벨로주… 이 영화가 더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곳곳에서 등장하는 사운드 트랙 덕분입니다. 6,70년대를 주름잡던 올드팝들과 R&B, 힙합을 넘나드는 삽입곡들은 인물들의 개성과 공간이 가지는 의미를 더욱 부각하죠. 뿐만 아니라 니콜라스 브리틀은 클래식과 가요의 조화를 시도합니다. 베이스와 같은 피아노의 울림과 위태로운 바이올린의 선율 등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필름의 흐름에 적절하게 배치하죠. 작곡가와 감독의 상호작용은 이 영화의 제목에 걸맞은 시너지를 발휘하는 데 성공합니다.
결국 샤이론은 케빈의 해변으로 돌아왔습니다. 프론트와 세련된 자가용, 그 모든 강인한 것들로 겉치레하고 있던 ‘블랙’은 케빈을 통해 다시 16세 시절의 '샤이론'의 자리를 되찾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진정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샤이론에게 '삶'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정체성을 발견하게 해준 해변에서의 순간은 기억해야 하는 순간임과 동시에 잊어야 하는 순간입니다. 영화의 쟁점은 ‘리틀’이라는 별칭을 거부하던 ‘샤이론’이 ‘블랙’이라는 또 다른 별칭으로 전락하게 된 하나의 사건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테럴 무리의 끈질긴 괴롭힘이죠. 그들의 폭력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요? 왜 자신의 본모습을 알기 위해 투쟁하던 소년은 자신의 본모습을 외면하고서 살아가야만 했나요? 그 물음의 끝에 바로 차별이 있습니다.
후안의 모습을 그대로 이어가는 샤이론. 그들은 말하자면 ‘Black’이라는 별칭으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흑인입니다. 이것은 ‘Woman’이라는 별칭으로 살아가던 어머니와, 어머니의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머니에 대한 비욘세의 그래미 공연과도 일맥이 상통합니다. 자기 자신을 잃은 그들은 후안의 말대로 누군가(Nobody)에 불과한 인생을 살아가죠. 세 파트로 나누어져 있는 한 인물의 성장기는 세습되어 내려져오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그대로 담아내기 위함입니다. 평등이 선언되고 15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 차별은 세습되고 문제는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잘 헤아려줄 수 있는 것은 동일한 상처를 받은 자입니다. 공감이 가진 치유력 앞에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테레사는 맬컴 엑스의 말마따나 미국 내에서 가장 무방비하게 방치된 흑인 여성입니다. 흑인이자 여성으로 이중 차별에 노출되어 있는 테레사는 흑인임과 동시에 성소수자로서 동일한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샤이론의 마음을 공감해줄 단 한 명의 인물이었습니다. 그녀의 포옹과 관심 덕분에 해변에는 더 많은 아이들이 나와 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결코 세상에 없던 성장기, 세상에 없던 로맨스를 그리지 않습니다. 평범하던 스토리는 다만 모두가 흑인이기 때문에 더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들이 흔하게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같이 <문라이트>의 발화점은 작품 바깥에 있습니다. 그것이 엄연히 존재하는 지금 <문라이트>는 화제의 대상입니다. 평범한 스토리의 이 영화가 모두에게 그저 '평범하게만' 다가올 앞으로를 기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