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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남 Feb 04. 2017

드니 빌뇌브, 인간성에 접촉하다

영화 <컨택트>가 압도하는 것들

스포일러: 보통


 여기, 눈높이보다 조금 더 높은 키에 불투명한 칸막이가 있다. 아무리 수줍음이 많은 사람일지라도 이 칸막이 안에만 들어가면 자신의 가장 은밀한 부분마저 서슴지 않고 드러낸다. 팔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누군가가 있는데도 말이다. 익숙하면서도 놀라운 이 칸막이의 힘은 바로 우리들의 시각에서 비롯된다. 보이느냐 보이지 않느냐가 인간의 행동 대부분을 결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시각에 의존적이며 시각은 언제나 우리를 압도할 준비가 되어있다. 칸막이를 돌연 없애버리면 볼 일을 보던 사람들은 서로의 못 볼 꼴에 압도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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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컨택트>의 시민들은 1500피트에 달하는 미확인 비행 물체 ‘셸’의 외관만으로 압도된다. 뉴스 속보는 셸이 지구 상에 나타난 지 단 40분 만에 전 세계에 보도되어 단숨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열두 개의 셸의 위치를 표시한 세계지도나 군함∙탱크∙미사일 따위의 시각자료가 연이어 방영되면서 시민들은 두려움에 빠진다. 불안감은 증폭되어 베네수엘라와 시에라리온의 폭동과 영국의 반정부 시위를 낳고, 식료품 사재기 현상이나 광신도들의 집단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사건들로 이어진다. 전 세계 사건∙사고는 또다시 전파를 타고 지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이 모든 일은, 상상 속의 UFO가 이제 막 눈에 보이기 시작한 무렵 벌어진 것이다. 셸과 지구 사이에서는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도시를 점령한 미확인 비행 물체 (셸)

 외계생명체의 사진이 공개되자 시민들은 일곱을 뜻하는 그리스어 ‘hepta’와 발을 뜻하는 ‘pod’를 합쳐 ‘햅타포드’라는 이름을 짓는다. 인간이 시각에 의존적이듯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도 시각에 의존적인 성향을 보인다. 외계생명체는 햅타포드로 불리는 순간 '일곱 개의 발을 가진 생명체’로 전락한다. 시민들은 그저 두 눈이 본 대로 일곱 개의 발이 외계생명체 모습의 전부일 거라며 언어로 단정해버린다.


 셸이 지구에 도착한 지 48시간 만에 시민들은 모든 의문에 대한 답변을 정부와 군 관계자들에게 요구한다. 이들은 '인류는 보호되어야 한다'는 슬로건을 내건 채 셸을 무력으로 진압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시민들의 의견에 적극 동조하는 인물이 할펜 요원과 중국의 솅 장군이다. 이들의 언어는 목적을 위해 의사소통 과정에서 교묘한 변형을 이룬다. 할펜은 '셸의 내부 공기가 다를 수 있다'는 말을 '셸은 인간의 호흡을 곤란하게 만든다'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솅은 '수단을 제공하다(offer weapon)'를 '무기를 사용하다(use weapon)'로 받아들인다. 목적 앞에 언어의 중의성은 변질되고 함축성은 외면받는다.


 셸이 보이지 않던 과거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은 셀이 보이기 시작한 현재를 직면한 후 셀이 사라진 미래를 갈망한다. 다시 말해, 시각의존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인간이 시간이라는 선형 구조 속에서 위와 같은 오류들을 범한 것이다.

셸의 내부에 진입한 루이스, 이안 그리고 요원들

 그들은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여기에 왔는가. 공포에 떨던 시민들의 우려와 달리 셸은 인간에게 해를 끼치기는커녕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가스∙폐기물∙방사능 따위를 방출하지도 않고, 내부 공간조차 지구의 환경과 완전히 동일하다. 하지만 안전하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요원들은 명목상의 안전 절차를 엄수하고 햅타포드와 거리를 유지한다. 이 거리감으로 별다른 진전이 없자 연대장 웨버는 이전에 정보원 역할을 했던 학자들을 몬타나 주로 데려온다.


 두려움 대신 궁금증에 사로잡힌 언어학자 루이스와 이론 물리학자 이안은 요원들과는 달리 손을 뻗어 셸의 표면을 흥미롭게 만져보고 햅타포드 가까이 다가가 보호 장구마저 벗어버린다. 심지어 그들은 햅타포드에게 애봇과 코스텔로라는 이름까지 붙인다. 동문서답을 하는 듯한 상황에서 떠오른 미국 개그맨 듀오의 이름은 그렇게 두 햅타포드의 새로운 정체성이 된다. 루이스는 다른 국가들의 연구자료에 의거하여 오해 여지가 없는 의사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애봇과 코스텔로에게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간단한 대화조차도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러한 시도는 좌절을 맞는. 음성 녹음을 수 차례 돌려보지만 루이스는 이들의 음성을 단 한 음절도 이해하지 못한다.

음성 언어가 아닌 문자 언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루이스

 음성(청각)으로 이루어지지 않던 의사소통은 화이트보드(시각)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그들은 마치 인간의 언어가 시각에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 시각을 통해 언어를 습득해나간다. 루이스가 유리벽에 손을 대자 따라서 다리 하나를 대고 이안이 두 발로 걷자 일곱 발로 따라 걸으면서 애봇과 코스텔로는 인간의 언어를 빠르게 배워나간다. 더불어 그들은 인간의 언어 뿐만이 아니라 인간도 시각에 의존적이라는 사실 역시 알고 있는 듯, 자신들의 비주얼 언어를 계속해서 유리벽에 투사하여 시선을 끈다. 영어를 가르치던 두 학자는 어느새 햅타포드어에 매료되고 로고그램 연구는 급속도로 발전한다.


 시작과 끝이 없는 원형 형태의 로고그램은 선형 구조의 인류어와 달리 목적성도 방향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인간의 언어가 인간의 특성을 대변하듯 햅타포드어는 곧 햅타포드의 특성을 대변한다. 비선형 구조가 곧 햅타포드의 특성이다. 언어가 인간의 사고방식을 결정하며, 한 나라의 언어를 배우면 그 나라의 방식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이 영화의 전제에 따라, 햅타포드어를 습득한 루이스는 애봇과 코스텔로의 '특성'을 배운다. 그리고 그 특성은 할펜이나 솅과 같은 목적형 인간들로 가득한 지구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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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들은 왜 여기에 왔는가. 이 물음의 끝에 인간을 구원하는 해답이 있다. 루이스는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라, 이안과 우리들에게 잘못된 선택처럼 보이는 일마저 모두 포옹하고 받아들인다. 인간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어떤 일을 판단할 때 과거(역사)를 돌아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SF 영화는 외계생명체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간을 더욱 적나라하게 조명한다. 당신은 보이는 그대로를 쉽게 믿어버리지 않는가. 목적을 위해 중요한 무언가를 왜곡하지는 않는가. 우리들의 지구는 현재 보이지 않는 셸을 직면하고 있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재앙을 초래하는 것은 시각의 직관성에 사로 잡힌 선형(목적형) 인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루이스(Louise)를 뜻하는 햅타포드어 로고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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