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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남 Apr 15. 2017

'박해일'이라는 코미디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

스포일러: 보통



 영국 출신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1889-1977)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모던 타임즈>(1936)에서 찰리 채플린은 기계시대의 인간소외라는 부정할 수 없는 비극을 우스꽝스러운 공장 노동자를 통해 희극화했다. 이 영화에 담겨 있는 것은 인생을 바라보는 찰리의 시선이다. 그에 의하면 스스로 진지함에 함몰되는 것은 인생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었으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극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능청스러운 웃음이었다. <모던 타임즈> 상영관은 언제나 관객의 웃음 소리로 가득했다. 그 웃음에는 인생을 조망하는 현명함이 담겨있었다.


 장률 감독의 영화 <경주>는 가까이서 보면 작중 인물들의 비극이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화창한 경주의 모습이 보이는, 비극과 희극의 조화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가택 바로 옆의 무덤처럼 작중 인물들의 삶은 죽음과 언제나 공존하고 있다. 상반되는 이미지의 중첩은 인생에 대한 감독의 인상을 관객에게 전달해낸다. <경주>는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다는 바로 그 명암의 대비에서부터 시작하는 영화다.


“집 앞에 능이 있으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윤희의 대사 중에서.


 영화 <경주>에서 경주라는 공간은 그 자체만으로 죽음의 이미지를 풍긴다.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능’이란 말하자면 위인의 무덤이고 역사와 문화재란 죽음 이후에 찾아온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동북아 정치사에 관하여 줄곧 자문을 구하는 박교수와 과거 일본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일본인 관광객의 모습은 죽음에 관하여 읊조리는 윤희(신민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윤희는 죽어서 능 안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직설적으로 내뱉는 경주 사람이다.


 죽음을 상징하는 공간 경주에서 인물들은 모두 간접적으로 죽음을 겪거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다. 윤희의 남편은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여 자살했으며 최현(박해일)의 선배는 원인 불명의 이유로 돌연사했다. 여정(윤진서)은 최현과 의도치 않은 관계를 가진 후 산부인과에서 홀로 아이를 지웠고 웃음이 해맑던 한 소녀는 엄마의 품에 안겨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사(死)는 인물들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도사리고 있지만, 생(生)에 관련한 잉태 혹은 생식은 경주에서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여정은 점쟁이의 말에 의하면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고, 최현과 윤희는 날이 밝아올 때까지 끝내 관계를 가지지 못했다. 이렇듯 영화 <경주>를 시종일관 장악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죽음’이다. 

춘화를 보기 위해 7년 만에 경주를 찾은 최현(박해일)


“차를 마셨더니 오줌이 잘 나오네.” -낙서를 읊는 최현의 대사.


 이러한 경주를 찾은 타지 사람, 그게 바로 최현(박해일)이다. 그는 죽음이 장악한 이 영화 속 단 하나의 '생'이다. 영화는 선배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으로 북경에 살던 최현이 대구의 장례식장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잠시 머물렀다 갈 사람에 불과했던 그는 자신을 중국인 혹은 배우로 오해하는 사람들에게 구태여 설명하려들지 않는다. 그러다 능 앞에서 입을 맞추는 커플의 모습을 본 그는 문득 허전함을 느끼고 하룻밤을 지새울 여자를 찾아나선다. 그러나 오랜 세월 중국 생활을 하면서 어느덧 타지 사람이 된 최현에게 경주는 낯선 곳이었고, 이방인의 모양새는 그를 줄곧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 뿐이었다. 심지어 윤희는 그를 변태로까지 오인하기에 이른다. <경주>의 해학은 바로 그 낯섦에서부터 시작된다.  


 최현은 현지 사람들의 모습을 모방함으로써 평범해지기를 택한다. 윤희의 모습을 일거수일투족 따라하고, 나아가 조깅을 하거나 체조를 하는 사람들을 흉내냄으로써 이방인의 냄새를 지우려든다. 그러나 낯설다는 느낌을 떨치려는 그의 모습은 오히려 그 자신을 더욱 낯선 사람으로 만들 뿐이다. 박교수의 물음에 ‘모든 것이 똥 같다’고 답하거나 일본인의 사과에 '저는 낫토를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는 최현. 시종일관 엉뚱하면서도 진지한 그는 말하자면 <모던 타임즈>의 공장 노동자와도 같다. 그는 어두운 경주를 내비치는 화창한 날씨다. 감독의 비관주의가 가지고 있던 무기력은 최현이라는 인물을 통해 환기된다. 덕분에 관객은 죽음을 이야기하는 영화 앞에서 그저 가볍게 웃어보일 수 있는 경지가 된다. 

최현이 경주에서 만난 사람들

 최현에게 경주란 추억하는 공간이었다. 그가 7년 전 춘화를 다시 보기 위해 경주로 향했고, 거기서 과거 하룻밤을 함께한 후배 여정을 만났다. 그러나 추억 속의 장면들은 온데간데없었고, 심지어 그의 카메라에는 경주에서 만난 사람들이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여정을 찍은 사진은 본인에 의해 지워졌고, 두 번 방문한 찻집에서 찍은 사진과 동영상에도 윤희의 모습은 없었다. 사진으로 남은 것은 일본인 관광객과 중국에서 온 최현이라는 타지 사람과 경주라는 공간 뿐이었다. 이때부터 경주는 최현에게조차 죽음의 공간으로 작용한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기묘했다. 어제 만난 점쟁이는 몇 년 전에 죽음을 맞은 사람이었다. 결국 그는 카메라를 쥔 채 자신의 촬영하는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는 길을 택한다.




 영화는 비극과 희극의 절묘한 중첩을 통해 북경에 사는 최현이 경주에서 느끼는 기묘함을 이색적으로 표현해낸다. 왕후의 시체가 묻힌 능 옆에서는 번쩍이는 모텔 간판 네온사인 아래서 남녀가 생식을 벌이고 있고 능 바로 앞에서는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입을 맞추고 있다. 문화재 사이로는 폭주족들이 굉음을 내며 달리고 있고 그들은 돌연 죽음을 맞는다. 경주의 수많은 인물들은 비극을 겪지만, 유일하게 최현의 카메라에 모습이 담겼던 경주 사람 다연은 ‘경주도 사람 사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경주>는 인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영화다. 인생이란 생과 사의 경계선을 위태롭게 걷는 것이다. 그리고 한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순간과 순간 사이에서 위태로운 삶을 연명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 숱한 죽음 속에서도 살아지는 인생이란, 참으로 기묘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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