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시는 곧 그녀만의 화법이다.
스포일러: 보통
나탈리 포트만은 내면과 외면의 괴리 속에 나타나는 위태로운 진동의 폭에 맞춰 공명(共鳴)하는 법을 안다. 그녀의 인물들은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하여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살지 못하거나, 어떠한 목표를 위하여 그렇게 살기를 거부한다. 자아(내면)가 비교적 뚜렷한 그들은 작품 내에서 시종일관 독주하지만, 자기 바깥의 지향점(외면)을 쫓느라 애처로이 방황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강인함으로 꾸며진 불안정한 내면의 소유자다. 장황한 대사 없이 오직 떨리는 두 눈동자만으로 나탈리 포트만은 그 모든 것을 이야기한다. 그녀의 응시는 곧 그녀만의 화법이다. 공명은 진동을 증폭시키고 관객에게 감동이라는 울림을 선사한다.
영화 속 인물의 행동은 마냥 평범하거나 도덕적으로 비범하지 않다. 그들은 대개 관객의 호기심을 부추기는 ‘이상한’ 행동을 하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전혀 이해받을 수 없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럴 때 인물은 꽁꽁 숨겨두었던 자신의 내면을 관객들에게 들키는 고의적 실수를 범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인물의 행동을 이해하고 동정하게 되며 어느 순간 마음을 뺏겨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영화의 인물과 평생토록 사랑에 빠진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영원한 소녀로 기억되는 마틸다처럼.
<레옹>은 지금의 나탈리 포트만을 있게 만들어준, 레옹과 마틸다의 대립각이 굉장히 인상적인 영화다. 레옹은 살인청부업자라는 강인한 외면과 달리 우유를 좋아하고 내면이 어리숙하지만, 마틸다는 열두 살 소녀의 몸으로 담배를 태우며 육체적인 사랑을 로망한다. 동생을 죽인 살인마에게 복수를 꿈꾸며 마틸다는 살인청부업을 배워나간다. 그러던 중 아버지뻘 나이의 레옹과 사랑에 빠지고 그에게 키스해달라고 요구한다. 짧은 미니스커트의 야시시한 차림을 한 마틸다는 시종일관 매력적이면서도 신선한 쇼크를 안긴다.
마냥 성숙하게만 보이는 그녀 역시 곰인형을 끌어안고 만화영화를 보는 어린아이에 다름 아니다. 마틸다는 레옹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자마자 TV 채널을 돌려버리지만, 관객은 시종일관 당돌하던 마틸다의 숨겨진 내면을 이 장면을 통해 목격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허울뿐인 가족 아래 방치되듯 자라왔던 마틸다에게는 스스로 강인해지는 것만이 각박한 세상을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부패경찰 스탠스에게 복수를 해야 했으므로 평범한 아이들처럼 어리광 피울 겨를이 없었다. 성숙을 가장한 미성숙의 내면 아래 그녀가 진정 바라던 것은 로리타적 성욕이라기보다 사랑으로 보살펴주는 안식처다. 불가피한 상황 속에 온전한 자신을 부정하던 마틸다는 러시안룰렛을 돌리는 순간 애처롭게 동요한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틸다의 눈동자를 보며 관객은 그녀를 이해하고 동정하기 시작한다.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러 나탈리 포트만은 <블랙스완>의 발레리나 니나를 통하여 연기의 정점을 찍는다. 니나는 극단적인 식단과 연습의 굴레를 자처하는 엄격한 완벽주의자임에도, 정작 주인공 배역을 따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 발레단의 전설적인 발레리나 베스의 은퇴로 니나는 새로운 시즌의 <백조의 호수> 주인공을 맡게 된다. 감독 토마는 백조와 흑조를 함께 연기하도록 지시하지만, 니나의 엄격주의는 자유분방한 흑조를 연기하는 데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해버린다. 니나는 두 연기 모두를 완벽하게 소화하기 위해 채찍질하지만, 피폐해진 정신은 공연에 대한 중압감과 맞물려 파괴적으로 변질된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시종일관 요동치는 그녀의 심리상태다. 모두가 탐내는 자리에서 전전긍긍하던 니나는 뉴욕 발레단의 새로운 단원 릴리를 본능적으로 적대시한다. 오디션을 망친 것도 토마와 갈등을 겪게 된 것도 모두 릴리의 탓이었고, 손가락의 살갗이 찢겨져 나간 것조차 성급하게 구는 릴리 때문에 벌어진 망각이었다. 니나는 백조(자아)와 흑조(지향점) 사이를 오가며 방황하다 결국 강박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나 아름답고 겁이 많고 연약하던 백조 니나가 흑조 연기를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연 릴리 덕이었다. 토마가 했던 ‘즐기면서 살라(Live a little)’는 말은 릴리를 통해 신호탄이 되어 니나를 변화시킨다. 덕분에 니나는 베스의 어두운 충동과 전형적인 흑조 베로니카의 시기심과 질투심까지 습득하게 된다. 결국 니나는 릴리를 모방함으로써 기교(trick)를 부리는 유혹적(seduce)인 흑조가 되는 데 성공한다. 백합(Lily)이 무성한 꽃다발을 두고 ‘아름답다’고 말할 때부터 릴리는 이미 니나의 뮤즈였다. 완벽을 추구하기위해 몸을 아끼지 않던 그녀는 끝내 완벽한 무대를 관객에게 선사하는 데 성공한다.
재클린 캐네디의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은 퍼레이드 도중 암살당한 존 F. 캐네디와 함께 돌연 막을 내렸다. 당시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TV 브라운관을 통해 백악관의 모습과 링컨 부부가 사용하던 가구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하던 그녀는 별안간 백악관에서 두 아이와 함께 내쫓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성대한 장례식을 끝으로 재클린은 대중들로부터 모습을 감췄다.
영화 <재키>에서 나탈리 포트만은 가장 떠들썩하던 시기의 재클린을 적확하게 재현해낸다. 몸짓과 말투 그리고 숨소리 하나까지 섬세하게 포착함으로써 베일에 감춰져 있던 재클린의 내면은 비로소 스크린을 통해 세상에 공개되기 시작한다.
30대의 젊은 나이의 영부인 재클린은 '재키 룩'을 탄생시킬 만큼 세련되고 화려한 사람이었다. 백악관의 화려한 파티와 비공개 공연들, 예술가와 지인으로 채워진 무도회장과 나뒹구는 샴페인 잔들은 모두 그녀를 위한 것이자 그녀에 의한 것이었다. 플래시백에서 재키의 관심은 남편의 죽음 자체보다 아일랜드 사관생도와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연주자로 이루어진 성대한 장례식, 여덟 블록에 거쳐 이어지는 거창한 추모 행진에 기울어져 있는 듯 보인다. 마치 사교계에 첫 발을 내딘 여자(debutante)처럼 겉치레에 목숨을 거는 그녀 모습에 사람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한다. 메마른 눈빛과 사무적인 태도로 무의미해 보이는 일들에 매달리는 재키를 그들은 구제불능의 천박한 여자로 치부해버린다.
백악관에 홀로 남게 된 그녀는 숨기고 있던 눈물을 쏟으며 격분하기 시작한다. 핏물로 얼룩진 재키의 차림새는 그제야 포커스에 잡힌다. 관객은 신음을 하고 몸서리를 치는 재키의 무방비 상태를 비로소 목격하고, 그녀가 허울뿐인 속물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재키는 무너진 내면과 슬픔을 결코 남들 앞에 드러내지 않는다. 샤워 부스에 들어가 핏물을 헹궈낸 후 다시 건조하게 메마른 여자가 된다.
그녀가 눈물을 멈춘 것은 다름 아닌 케네디 때문이었다. 차기 대통령 존슨의 임명식은 캐네디 암살 직후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진행되었고, 그 순간 재키는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제임스 가필드와 윌리엄 맥켄리가 그랬듯 남편이 대중들로부터 잊혀질 것이라고 직감한다. 그녀는 캐네디의 노고가 되도록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그리고 그 기억은 되도록 아름답기를 바랐다. 마치 링컨을 떠올릴 때처럼. 이때부터 재키는 링컨의 행진과 장례식을 두서없이 모방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면 사람들이 케네디를 링컨과 동일하게 기억할 것이었다. 그녀의 무모한 시도들은 결코 유치한 놀잇감(silly knick-knacks)이 아니었다.
사실에 주목하는 것은 신이고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은 인간이다. 동화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녀는 기자의 인터뷰 내용을 편집하거나 필요한 부분을 직접 필기해주기까지 한다. 덕분에 검지 손가락이 담뱃진으로 누렇게 변색될 정도의 해비스모커였던 재키는 대중들에게 비흡연자의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었다. 실제로 널리 알려진 기록들은 대부분 사실과 달랐다. 말하자면 재키는 잘 알려진 20세기 인물들 중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결국 그녀는 영원히 기억되는 일에 성공한다. 그녀의 막무가내는 퍼스트레이디로서 현실을 극복하는 그녀만의 방법이었다.
나탈리 포트만이 연기하는 인물들은 현대인과 많은 부분이 닮아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온전한 나 자신을 외면한 채, 내면의 나약함은 숨기고 강인한 외면으로 둔갑하면서, 그렇게 표리부동한 모습으로 소리 없이 아우성치며 살아가는, 바로 우리네 모습 말이다. 이성을 강요하는 세상 앞에 소외된 감성은 언제나 위로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서로에게 무관심한 몰이해의 사회 속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언제까지고 이상한 괴짜로 살아가야만 하는 운명에 처해있다.
로리타적이거나 사이코틱하거나 속물적인 행동 뒤에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저마다의 속사정이 있다. 누구에게나 남들로부터 숨기고 싶은 나약한 내면이 있으며, 우리는 나와 동일한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를 받는다.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는 외롭고도 고독한 우리의 운명에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준다. 그녀의 두 번째 출산을 축하하며, 차기작 소식을 조심스레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