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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남 Jun 09. 2017

한 번 찾아와,
인생의 중심이 된 그녀.

조현훈 감독의  <꿈의 제인>

스포일러: 강함



 비행청소년들은 거주 공간을 가진 자를 중심으로 모여 집단생활을 한다. 그들은 소속되는 집단을 ‘팸', 거주지의 소유자를 성별에 따라 ‘엄마’나 ‘아빠’라고 부른다. 파괴되면서 새롭게 형성된 집단과, 그 집단 내에서 살아 숨 쉬는 자들이 있다. <꿈의 제인>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진다. 소현이 제인의 팸에 소속되어 있을 때와 소속되어 있지 않을 때다. 이 두 파트는 같은 사람과 같은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완벽하게 동떨어진 두 세계처럼 표현된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하물며 끝나고 나서도 둘의 전후관계를 파악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순차적인 서사의 과정을 과감히 파괴한 플롯에서 감독이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마치 꿈을 꾼 것과 같은 영화의 몽환성은 이러한 구성에서부터 출발한다.


제인(구교환)의 첫 장면

 영화는 막을 올리는 순간 소현의 내레이션과 제인의 화려한 등장으로 가득 찬다.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들 속에서 한 번도 진실한 인간으로 살아보지 못했던 제인은 어느 날 자신의 가게를 찾아온 소현을 목격하고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무대에 오른 제인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 곁에 머물 수 있는지 방법을 몰랐다'고 고백한다. 소현은 그 고백을 듣고 제인에게 순식간에 매료된다. 이 날을 마지막으로 소현은 더 이상 제인을 볼 수 없었지만, 그 후에도 제인은 줄곧 소현의 삶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제인의 꿈을 꾸는 소현(이민지)

 파괴되어 새롭게 생성된 집단에 속해있던 것은 제인도 마찬가지였다. 소현과 같이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운명이었던 제인은 꿈을 꾸었고, 그 꿈을 믿으면서 살아왔다.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괜찮다고 했다. 믿음이 깨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정말 괜찮았다.

 

매일 밤 꿈에서 정호랑 난 항상 연인이야. 그럼 됐어.
내가 그렇게 믿으면.


 제인을 만나고부터는 소현도 꿈을 꾸었다. 이들의 꿈은 단순히 꿈으로만 머물지 않고 현실에 수시로 영향을 미쳤다. 허상에는 희망이 있었고 그 희망을 제인과 소현은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소현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이건 제인의 꿈과는 달리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는 부분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에서 화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소현이라는 점이다. 사실상 이 영화는 소현의 눈으로 바라본 현실이자 꿈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현실이며 어디까지가 꿈인가. 경계가 허물어진 영화를 받아들일 때 필요한 건 바로 그 경계를 관객 나름대로 재구축하는 과정일 것이다. 꿈은 일상에서 각인된 이미지로부터 비롯된다. 소현의 뇌리에 깊게 박혔던 것은 삶의 일상성에서 벗어난 제인의 모습이었다. 무대 위에서 제인은 반짝이는 의상에 네온사인과 미러볼의 조명을 받아 화려했다. 그렇다면 소현의 꿈은 바로 그 화려함에서 시작될 것이다. 이 영화의 구분점은 바로 그 조명이다. 


<꿈의 제인>의 꿈과 현실은 조명으로 구분된다.

 소현이 제인의 팸에 소속되어 있지 않을 때 사용되는 조명은 형광등, 태양광과 같이 사실적이고 왜곡이 없다. 그 불빛 아래에서 소현은 병욱의 팸에게 신고식을 당했고 지수를 만났으며 정호의 모텔방에 들렀고 쉼터로 돌아갔다. 이것은 소현이 실제로 겪은 현실이 된다. 제인의 팸에 소속되어 있는 동안은 네온사인이나 색조명, 루비, 미러볼에 반사되는 파편의 빛처럼 현실을 왜곡하는 인위적인 조명이 사용된다. 그 불빛 아래 모든 사건은 소현의 꿈이 된다. 우리가 본 제인의 모습은 상당 부분이 허상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왜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었을까. 이는 꿈의 본질에 대한 감독의 고찰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꿈은 현실과의 괴리감이 적을수록 인생에 더 큰 위로를 선사한다. <꿈의 제인>이 택한 꿈이란 일상 속 순간순간의 가정에서 비롯되는 상상의 구현이다. '현실의 탈피'가 아니라 '현실의 재구성'이다. 가령 정호가 나를 사랑했더라면, 지수 언니가 살아있더라면… 과 같이. 제인과 소현은 현실의 영향을 받은 꿈을 꾸었다. 그리고, 꿈의 영향을 받은 현실을 살았다.


제인의 집에서 소현(좌)과 제인(우). 실제로는 주희의 집이었다.

 재구성된 꿈은 현실의 반복이었지만 양상이 좀처럼 달랐다. 소현의 팸의 중심은 제인이 되었고, 주희가 살던 집은 제인의 집이 되었다. 지수와 대포와 쫑구는 제인의 팸의 맴버가 되었으며, 이들은 병욱의 팸과는 달리 하나의 완벽한 집단이 되었다. 사람들 곁에 머무는 방법을 모르던 소현과 제인은 언제나 사람들과 함께했다. 그렇게 같은 사람이 나왔지만 사실상 다른 사람이었고 같은 공간이 나왔지만 사실상 다른 공간인, 완벽하게 동떨어진 두 세계가 완성되었다.


 이외에도 소현의 현실의 많은 부분들이 꿈으로 재탄생했다. 하지만 꿈이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현실에서 비롯되어 시작된 꿈은 끝나는 순간에도 현실의 영향을 받았다. 제인은 지수가 그랬듯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소현은 움찔했고, 곧 꿈에서 깨어났다. 또다시 외톨이였다. 


돌아왔구나.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는 영화는 마치 순환구조를 이루는 듯 보인다. 현실과 꿈의 반복은 불행과 행복이 반복되는 하나의 인생을 표현하는 것처럼 느껴진. 제인은 말했다. 불행의 연속인 인생은 드문드문 찾아오는 행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제인은 소현의 꿈이 되었고, 소현의 인생에 찾아오는 행복이 되었다. 소현은 연속되는 불행으로 삶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때마다 꿈을 꾸었다. 그러면 제인이 다가와 노크를 했고, 진한 화장으로, 담배연기를 뱉으며 이렇게 반겨주었다. 돌아왔구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제목 그대로, 꿈 속의 제인이다.

 신고식으로 온몸을 두들겨 맞는 동안, 얼굴에 비닐봉지가 씌워진 채 트럭에 실려 이동하는 동안, 소현은 계속해서 꿈을 꾸었고, 그렇게나마 현실을 버텼다. 인간의 도리가 아닌 일에 가담한 꼴이 된 소현은, 꿈속에서나마 지수의 동생 연수에게 구원을 받았다. 비참한 현실이었지만, 소현은 어쩌다 이렇게 한 번 행복하면 됐다. 자신을 위해 용기를 내어 노래를 불러주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정호가 떠나간 순간, 제인의 인생은 시시해졌다.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라던 제인은 결국 현실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믿음은 깨졌고 희망은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녀는 유머를 잃지 않은 모습으로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소현의 꿈속에서, 그리고, 관객의 기억 속에서.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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