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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남 Apr 01. 2017

만인의 꿈에 가려진 사람들

다큐멘터리 필름과 인물(Talented but troubled)

스포일러: 보통


 유년기 시절 선생님이 건네주었던 종이의 장래희망란은 참 조그맸다. 경찰이나 소방관, 피겨 여왕이나 대통령 같은 단어 하나면 금방 채워질 크기였다. 아이들은 정해진 공간 안에 '희망하는 앞날' 대신 일목요연한 직업명을 적어 넣었다. 그렇게 ‘꿈=직업’이라는 등식을 너무나도 당연시 여기는 어른이 되었다.


 원하는 직업을 얻고 그 직업에서 일정한 지위에 오르며 최종적으로 그 직업군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현대인 대부분의 인생 목표다. 우리들의 히어로는 악당을 물리치고 세계 평화를 일궈낸 슈퍼맨이 아니라, 직업능력을 인정받고 정상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먼저' '얼마나 빨리' 그 자리를 차지하느냐이며, 대개 그 영광을 누리는 것은 타고난 재능을 가진 영재들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영재들은 행복할까? 두 편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통해 당연한 줄만 알았던 등호에는 빗금이 쳐지기 시작한다. 꿈은 결코 어떠한 종류의 직업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을 간과하는 순간 무기력은 시나브로 찾아온다.


<댄서> (2017)

로얄발레스쿨의 최연소 수석무용수, 세르게이 폴루닌

 세르게이 폴루닌은 댄서를 꿈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재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로얄발레스쿨 1학년 시기 동안 2학년 레슨까지 완벽하게 습득했고 누구보다 단기간에 솔로이스트 파트를 마스터했다. 18세의 나이로 퍼스트 솔로이스트(first soloist)가 되었으며 이듬해 열아홉의 나이로 로얄발레스쿨의 최연소 수석무용수(principal)가 되었다. 타고난 천재성과 불굴의 성실성에 힘입은 세르게이의 앞날은 유망하기만 했다. 머지않아 그는 세계적인 천재 아티스트로 우뚝 설 것이었다.

 그의 춤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고 많은 아이들이 꿈을 키웠다. 정해진 안무 속에 매번 색다른 세르게이의 모습을 보기 위해 2년 치 공연을 전부 예약하는 관객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대 위에서 단 한순간도 행복하지 않았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세르게이의 꿈은 로얄발레스쿨의 최연소 수석무용수가 되는 것도, 세계 제일의 댄서로써 이름을 남기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르게이의 꿈은 자신의 재능으로 인해 흩어진 가족을 다시 모이게끔 만드는 것이었다. 유연성을 타고난 데다 유년기에도 기계체조 같은 활동적인 것들을 좋아했지만, 정작 발레를 시작하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 하나만 믿고서 아들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발레학교로, 나아가 영국의 로얄발레스쿨로 진학시켰다. 덕분에 세르게이는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지만 가족들은 어려운 형편 속에서 교육비를 충당하기 위해 여러 나라로 흩어져야만 했고, 타지에서의 외로운 생활은 어린 세르게이 혼자서 감당해야만 했다. 그가 최고의 자리를 꿈꾸며 레슨에 집착했던 것은 그렇게 되어야만 가족이 다시 모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세르게이에게 부모님의 이혼 소식은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세계 최고의 댄서가 될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기력 속에 육체적 고통과 외로움을 가까스로 견뎌오던 그는 결국 극심한 우울증에 빠져 자제력을 잃고 폭발했다. 몸에 타투를 새겼고 코카인에 손을 댔으며 향락적인 파티와 술에 빠져 살았다. 매체들은 그의 비행을 연일 기사화했고 결국 세르게이는 로얄발레스쿨의 문제아로 낙인찍혔다. 모스크바의 게스트 아티스트로서 댄서의 삶을 재개하지만 거기서도 그는 반복적인 권태를 느꼈다. 최고가 되기 위한 동기를 잃어버린 세르게이는 결국 정상의 자리에서 은퇴를 갈망했다.


 공인이라는 이름 아래 내면의 고통은 언제나 외면받았고, 이십 대 청년으로서 당연한 방황이었음에도 따가운 눈총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수많은 아이들의 본보기로서 존재해야만 했고 수많은 관중들의 영웅으로서 살아가야만 했다. 세계 제일의 댄서가 되는 것은 학비를 벌기 위해 자국을 떠난 할머니와 아버지, 뒷바라지를 위해 인생을 포기한 어머니의 꿈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타인의 꿈을 위한 의무만이 있었고 자신의 행복을 위한 권리는 없었다. 세르게이는 차라리 극심한 부상을 당하여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사람들의 입방아에 더 이상 오르내리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그에게 직업이란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세르게이는 언제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꿈=직업'이라는 등식 아래 목적과 수단을 혼동하는 만인에게있어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은 곧 직업이었다. 그들에게 세르게이는 만인의 꿈을 저버린 문제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들은 세르게이를 비난하고 외면했다. 그리고는 인생이 아닌 취업이나 승진 따위에 목을 맸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세르게이의 공연이 시작되고, 그의 가족이 무대에 오른 세르게이를 객석에서 처음으로 마주한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올 수 없었던 공연장에서 그들의 눈빛이 제법 의미심장하게 빛난다. 성황리에 공연이 끝나고, 대기실을 찾아온 할머니는 그를 가만히 포옹하며 다만 이렇게 말한다.


"용서해주렴."




<에이미> (2015)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보컬리스트 아델. 그녀는 공연 도중 "와인하우스가 내 가수 경력의 90%를 만들어줬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날은 영국의 여가수 에이미 와인하우스의 서른세 번째 생일이었다. 아델은 에이미를 보며 가수의 꿈을 키워나갔고, 덕분에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에이미는 아델의 로망이자 뮤즈였고, 그녀가 없었더라면 6000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지금의 아델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아델은 브릿 어워즈에서 에이미와 한 무대에 서는 영광까지 얻게 된다.

https://youtu.be/TPYp33C1nes

제 28회 브릿 어워즈에서 한 무대에 오른 아델, 그리고 에이미 와인하우스

 어렸을 때부터 다이나 워싱턴, 세라 본, 토니 베넷의 음악을 즐겨 들었던 에이미는 16세에 국립 청소년 재즈 오케스트라에서 ‘Moon River’의 보컬을 맡았고, 스물 하나의 나이로 영국 데뷔에 성공했다. 그녀의 데뷔 앨범 [Frank]는 2003년 영국 앨범차트 3위를 기록하고 머큐리 음악상의 후보로 올랐으며, 두 번째 앨범 [Back To Black]은 2008년 영국에서 25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고 그래미 어워즈의 ‘올해의 음악상’, ‘올해의 레코드상’을 포함한 5관왕에 성공했다. 단 두 장의 앨범만으로 에이미는 영국의 전설적인 여성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게 에이미는 아델을 포함한 만인의 우상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가수의 꿈을 키워준 그녀였지만, 정작 그녀의 꿈은 가수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렸을 적 에이미는 사람들의 주목에 몸서리를 칠 정도로 수줍음이 많은 소녀였다. 심각한 외모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던 터라 유명해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지만 가수라는 직업에는 관심이 없었다. 음반을 발매하거나 관객들 앞에서 공연하는 일이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고 느꼈다.


 세상에 자신을 닮은 곡이 하나도 없어 더 이상 부를 노래가 없다고 느낀 순간, 에이미의 작곡 활동은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대변해줄 노래를 만들고자 겪은 일들을 토대로 곡을 썼으며, 마치 사람을 사랑하듯 음악 자체를 순수하게 사랑했다. 어쩌면 그녀의 꿈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도 그녀는 자신의 노래가 사람들의 관심을 살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애초에 대중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대중에게 잊히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에이미의 개성 있는 음색과 독창적인 음악은 영국을 넘어 미국 시장까지 단숨에 점령했으며, 모두가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 했다. 그녀는 우쭐해하기보다 민망해했고 사람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노래가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사람들 앞에 나가 '백 투 블랙'을 불러야만 했다. 파파라치와 언론기자들에게 무방비하게 노출된 채 광적인 환호와 플래시 세례 속에서 에이미는 종종 갈 길을 잃었다. 그럴 때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것은 그녀의 연인들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인들을 사랑했고 연인과의 기억이 담긴 노래들을 사랑했다. 나이차가 많았던 첫사랑 크리스 테일러와는 정열적이고 극단적이고 격렬한 사랑을 했고, 마약쟁이 블레이크 필더와는 충동적이고 파괴적이고 난폭한 사랑을 했다. 그들과의 감정이 식었을 때 [Frank]와 [Back To Black]의 수록곡들은 우울한 그녀의 탈출구가 되어주었다. 그러나 음악은 유명세를 불러일으켜 그녀에게 상처만 안길 뿐이었다. 이제 그녀는 음악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그녀의 연인 블레이크뿐이었다.

 에이미는 블레이크를 따라 크랙 코카인과 헤로인을 일삼았다. 블레이크가 약에 취해 깨진 유리병으로 자신의 팔을 긋자 에이미는 “네가 하는 건 다 할 거야”라고 말하며 똑같이 자기 팔을 그었다. 그녀는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는 게 놀라울 정도로 많은 양의 마약과 술을 복용했고, 몽롱한 상태로 공연(이든 프로젝트, 2007년 7월 콘월)에 올랐다. 결국 전 세계 공연이 연달아 취소되는 상황에 이르렀고, 언론의 비난은 도를 넘어섰다. 그러던 중 블레이크가 경찰에게 검거되었고 에이미는 사랑하는 모든 대상을 잃게 되었다. 그녀의 상태는 겆잡을 수 없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존경하는 토니 베넷에게 그래미 어워즈의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지만,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망가져버린 후였다.

21세 데뷔 27세 사망. 비운의 천재 뮤지션 에이미 와인하우스




 에이미는 자신의 재능을 평범한 삶과 바꾸고 싶어 했으며, 세르게이는 자신의 재능이 초래한 상황을 원상태로 복구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천재적 재능을 인정받고 모두가 꿈꾸는 경지에 올랐지만, 그에 걸맞지 못한 행보로 문제아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에이미는 가수를 꿈꾸지 않았으며 세르게이는 댄서를 꿈꾸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직업이 아니라 한 명의 사람으로서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이었다. 어떠한 의미에서 그들은 변질된 '꿈'(직업)에 가려진 개인의 '삶'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필름에는 사람이 담긴다.


 영화에는 환상적인 꿈이 담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필름에는 사람이 담긴다. <댄서>와 <에이미>에는 만인의 꿈에 가려져있던 두 사람이, 그들이 일궈낸 명성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 자체가 담겨있다. 인생에는 수많은 난관이 있다. 그러나 인생의 의의가 그저 난관을 해결하는 데에만 있다면 삶은 결코 고결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꿈이 뭐니' 하고 누가 물을 때, 대답은 단어보다는 문장이, 문장보다는 그림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희망하는 앞날을 그려볼 줄 아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이전 11화 한 번 찾아와, 인생의 중심이 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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