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속5센티미터>, <언어의 정원>, 그리고 <너의 이름은.>
스포일러: 약함
인연이라는 말이 가진 울림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인 것도 같고 예상못한 '우연'인 것도 같아, 그 말 앞에선 불운도 비극도 용서가 된다. 인연은 일상의 권태와 삶의 무력함에 지쳐있을 때 선물처럼 혹은 기적처럼 불현듯 다가온다. 그런 인연을 마냥 좇고 갈구하자니 욕심을 부리는 것 같고, 그렇다고 남의 이야기인 양 부러워하고만 있자니 삶이 너무 처연해진다. 인연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인연을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인연은 우리를 긍정하게도 부정하게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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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는 인연을 끊임없이 고찰하고 투영하는 감독이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행방불명’이 된 이 시점에 그의 신작 <너의 이름은.>이 가진 활력은 정말 대단하다. 애니메이션 컨텐츠의 중심지 일본 뿐만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굉장한 흥행 성적을 보였다. 사람들이 <너의 이름은.>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작품이 들려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문학은 시대를 대변한다고 말한다. 인연에 대한 감독의 철학에는 현대인들을 매료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마코토의 국내 데뷔작처럼 느껴지는 <초속5센티미터>. 이 영화는 위의 세 작품 중에서 우리들의 삶과 가장 많이 닮아있다. ‘벚꽃이야기’, ‘코스모나우트’, 그리고 ‘초속5센티미터’의 3부작으로 구성된 영화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보편적인 첫사랑이 주는 그리움과 허전함, 쓸쓸함을 세세하고 현실감있게 포착한다. 1화 ‘벚꽃이야기’는 타카키와 아카리의 첫사랑 이야기가 독백 형식으로 펼쳐지며, 2화 ‘코스모나우트’는 타카키를 짝사랑하는 카나에의 입장에서, 그리고 3화 ‘초속5센티미터’는 다시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타카키의 입장에서 전개가 이루어진다.
'벚꽃이야기' 속 사랑은 이어지는 반면 '코스모나우트'와 '초속5센티미터' 속 사랑은 이어지지 않는다. ‘벚꽃이야기’의 타카키는 아카리와의 관계를 편지와 약속을 통해 이어나가려 하지만, ‘코스모나우트’와 ‘초속5센티미터’에서는 그러지 않기 때문이다. 역과 역 사이의 믿을 수 없는 거리감과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내며 아카리에게 향하던 타카키는, 수신인이 없는 문자를 버릇처럼 쓰는 고교생이자 어느새 첫사랑을 추억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이러한 '행동의 부재'는 카나에와 같은 주변 인물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1화와 2, 3화의 대비는 첫사랑이냐 아니냐보다 행동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우선이다. 행동하지 않는 이들에게 인연은 그저 첫사랑이라는 이름의 추억이 된다.
이 영화가 의미를 부여하는 '시속 5킬로미터' 혹은 '초속 5센티미터'와 같은 속력은 상대에게 다다르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애틋하지만, 한편으로는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속력이 아니라 방향이다. 한 방향으로 걸어가기만 하는 둘은 함께하지만 결코 이어지지 못한다.
그 방향성이 서로를 향해있는 것이 <언어의 정원>의 타카오와 유키노다. 이들의 만남은 말 그대로 우연에서 시작된다. 이제 막 고교 1학년생이 된 타카오는 학생들의 꿈을 어린애의 망상처럼 비웃는 학교가 너무나 싫어, 비가 오는 날이면 의미없는 수업을 듣는 대신 신주쿠의 정원으로 향한다. 거기서 이름도 직업도 알지 못하는, 다만 맥주에 초콜릿을 곁들여 먹는 조금 이상한 여자를 만난다. 웬일인지 그녀 역시 비 오는 날마다 정원을 찾았고 타카오는 ‘원래 인간이란 조금씩 이상한 부분이 있다’는 여자의 말에 공감한 후 다가가기 시작한다. 우연으로 시작한 그들은, 비가 내리는 날마다 정원으로 향하면서 인연을 만들어간다.
빗소리와 희뿌연 안개는 정원을 세상과 단절된 은밀한 공간으로 만들어낸다. 때마침 장마가 시작되고 타카오와 유키노의 관계는 점점 더 깊어진다. 하지만 일시적인 지속성을 가진 장마 속에서 이들의 관계는 끝날 예정이었다. 비가 그치면 종말될 유예의 시간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던 그들은 그러나 서로에게 달려감으로써 유한하던 운명을 연장시킨다. 행동하는 이들에게 인연은 그저 그런 추억이 아니다. 장마가 끝나고 다음 계절이 와도 이들의 관계는 줄곧 이어진다.
<너의 이름은.>에서 인연은 '무스비'로 표현된다. 무스비(結び)란 매듭을 뜻하지만, 작품에서는 꼬이고 엉키고 끊어지고 다시 이어지는 인연의 모습을 말한다. 이 영화에 의하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시간, 시간과 운명같은 모든 것들은 무스비를 통해 연결되어 있다. 미츠하와 타키 역시 이 무스비로 맺어진 관계다. 등지고 있던 그들이 무스비를 통해 서로를 바라보는 오프닝 장면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사람들은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느낌, 계속 '누군가' 혹은 '어딘가'를 찾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고서 평생을 살아간다. 그것은 인생의 목적이나 목표와 같이, 타키같은 청춘에게는 취직이라는 현실적인 문제와 같이 저마다 다른 형태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직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그런 상실감과 기시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때문에 타인들의 대화에 괜스레 귀가 기울여지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한다. <너의 이름은.>은 이러한 일상의 감정을 기반으로 한다. 이 영화의 판타지는 황혼녘의 시간처럼 그저 환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신과 인간을 잇는 의식에서 신사의 딸 미츠하는 땅의 수호신에게 쿠치카미사케(口噛み酒)를 바치고, 이토모리의 불운을 모면하기 위한 미츠하와 타키의 좌충우돌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머리를 묶는데 사용하던 미츠하의 무스비는 승강장에서 타키에게 전해지고, 그 후 인연은 줄곧 이어진다. 서로의 몸이 뒤바뀌면서 벌어지는 사건은 작품 후반부에서 마치 꿈처럼 받아들여지게 되는데, 살아가면서 우리가 데자뷰처럼 느끼는 순간들, 상상과 공상의 순간들이 그 비논리성에도 불구하고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끝을 맺는다. 결말에 다다라 <너의 이름은.>의 판타지는 마침내 현실의 우리들 이야기가 된다.
결국 우리들의 일상의 감정은 무스비라는 인연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것은 무스비다.
서로 다른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하게 된 미츠하와 타키는 서로를 찾아 뛰어다니고 결국 한 마을에서 재회한다. 하지만 서로를 마주하고서도, 스스로가 진정 찾고 있던 것이 ‘누군가’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도, 그들은 마치 타인처럼 서로를 스쳐지나간다. 타키는 계단참에 다다라서야 그녀를 부르고 이름을 묻는다. 끊어지려던 그들의 인연은 서로를 돌아봄으로써, 서로를 부름으로써 다시 이어진다. 마침내 ‘끝없는 추억하기’는 종결되고 제목의 물음표는 온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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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에게 인연은 만들어가는 것이며, ‘너의 이름은?’하고 물을 때 비로소 이어진다. 인연을 우연에 그치게 하지 않고 지속시키는 힘은, 감독에 의하면 다름 아닌 용기다. 이 용기에 대한 이야기가 <초속5센티미터>와 <언어의 정원>, 그리고 <너의 이름은.>을 꿰뚫고 있다. 세 편의 영화 포스터를 다시 본다. 그리고 그 속의 두 인물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어느새 ‘첫 눈에 반한다’는 말의 신비로움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무모함의 자리를 마코토의 철학이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