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나은 글을 쓰려면

레스터 영 Lester Young

by 이락 이강휘

맞지 않는 옷을 입었을 때의 불편함을 생각해본다. 손을 들면 옆구리 쪽이 당겨오고 허리를 틀면 등 쪽이 불편하다. 내 모든 감각은 어떻게 하면 옷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을지에 대해서만 신경을 쏟는다. 당연히 해야 할 일에 능률은 오르지 않는다. 머릿속은 그저 이놈의 거추장스러운 껍데기를 얼른 벗어버리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찬다.


무조건 콜먼처럼 불러보게!

레스터 영 Lester Young을 불러와서 콜먼 호킨스 Coleman Hawkins처럼 색소폰을 불어보라고 하루 종일 호킨스의 연주를 들려줬던 플레처 헨더슨 Fletcher Henderson의 만행에 진통하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그의 모든 감각은 호킨스를 피하기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으리라. 나는 저렇게 불지 않을 거야. 나는 내 스타일을 지킬 거야.


한동안 어떻게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을 때가 있다. 김영하의 탄탄하고 정교한 문체에 반해 그를 따라 해 보려고 노력한 적도 있고, 성석제의 특유의 해학이 마음에 들어 어설픈 유머를 녹여 내보려다 괜히 분위기 썰렁하게 만들어 본 적도 있다. 유시민의 지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문체를 따라 해 보기도 했지만 한없이 얕은 지적 깊이만 들통났을 뿐이다. 글쓰기, 참 어려웠다.


아무런 진척도, 발전도 없는 나날을 보내다 아이들 수업을 준비하면서 이오덕 선생의 책을 보았다. 글쓰기 교육에 대한 명언들로 꽉꽉 채워진 그 책에 있는 한 마디가 내 뒤통수를 딱 때렸다. ‘글짓기하지 마세요. 글쓰기 하세요.’

이오덕 선생의 책은 글쓰기 교육의 좋은 교과서이다.

그렇다. 나는 글을 ‘짓고’ 있었던 거였다. 애써 글을 지어 내려다보니 글 속에 나를 드러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글을 쓸 때면 힐끔힐끔 다른 사람 눈치를 보다가, ‘와, 이게 좋은데?’하는 걸 따라 하고 ‘오, 이거 내 스타일인데?’하는 걸 모방했다. 그러다 보니 분명 내가 쓴 글인데도 거기에 나는 없고 누군가의 그림자만 어설프게 남았던 것이다.


나는 김영하, 성석제, 유시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동시에 굳이 그들처럼 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기로 했다. 나의 글을, 글솜씨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러서인지 요즘은 좀 편하다. 글을 잘 쓰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편하게 글을 쓸 수 있다. 빼어나게 유려한 글을 쓸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누구의 흉내를 내다가 나무에서 떨어지거나 삼천포로 빠지는 일은 없다. 더 이상 글을 지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1930년대 할렘 뒷골목 클럽에서 들리는 콜먼 호킨스의 묵직한 테너는 얼마나 멋들어졌을까? 자욱한 담배연기, 쨍쨍 거리는 술잔 부딪히는 소리를 뚫고 심장으로 직행하는 그의 중저음은 얼마나 강렬했을까? 레스터 영은 그 멋을 거부했다. 플레처 헨더슨이 아내까지 동원해서 닮게 만들려고 했던 그 소리를 외면했다. 그것은 추측건대 ‘어차피 나는 호킨스처럼 연주하지 못하니까’라는 자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그 자각이 ‘굳이 저렇게 연주할 필요는 없지!’라는 확신으로 변모한 것이리라. 그래서 그런지 그의 연주에는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 자신의 연주를 아끼는 마음이 없었다면 지켜낼 수 없었던 고집이 있다. 그 고집이 빌리 홀리데이라는 영원한 단짝을 만나게 만들었고 후에는 쿨재즈를 만들어낸 수많은 후배 뮤지션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레이디 데이와 프레즈

그런 의미에서 레스터 영과 테디 윌슨 Teddy Wilson이 함께 한 앨범 “Pres And Teddy”는 참 듣기 좋다. 전성기가 한참 지난 시점에 녹음된 것이라고는 하지만 ‘난 애초부터 이렇게 연주했다네.’하면서 간결하게 솔직하게 늘어놓는 그의 테너에서 자기 고집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거장의 품격이 느껴진다. 앨범명도 무려 ‘대통령’과 테디가 아닌가!(서태지가 ‘문화대통령과 아이들’이라는 앨범을 낸 거랑 비슷한 것이랄까? 오, 저 자신감!) 내가 레스터 영을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어땠을까? 어떤 글이 내가 쓸 수 있는 글인지 갈피를 못 잡고 이런저런 대단한 작가들을 흉내 내기 바빴던 그때 그를 만났다면 불편한 옷은 벗는 게 상책이라는 것을 좀 더 일찍 깨달을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지금보다 더 많은 글을,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레스터 영의 ‘All of Me’를 배경 삼아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읽었다. 거리가 저렇게나 먼 두 대상을 아무렇지 않게 가져와 묶어버리는 담대한 비유, 적재적소에 딱딱 꽂아 실웃음을 짓게 하는 유머, 무릎을 치게 만드는 탁월한 식견. 나는 책을 덮고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다시 또 흔들리는 마음을 가다듬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직 한참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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