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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Oct 15. 2020

HJ그룹 딸 가출사건 下

수록시: <추천사>, 서정주

“춘향이 ‘머언 바다’를 상징하는 어떤 곳으로 나아가고자 했다는 건 맞다네. 2연도 한 번 볼까?”


닭살이 가라앉은 뒷덜미를 매만지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2연에서는 떠나고 싶은 공간이 나열되어 있군. ‘수양버들나무’, ‘풀꽃더미’, ‘나비’, ‘꾀꼬리’가 그것들이네.”

“그런데 선생님!”

“말해보게, 완승 군.”

“수양버들나무, 풀꽃더미, 나비, 꾀꼬리. 이들은 모두 긍정적으로 보이는데요. 왜 이것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을까요?”

“음, 그건…….”


선생님은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건, 수식하는 말을 주목해야 할 듯하네. 그것들에게는 ‘다소곳이 흔들리는’, ‘베갯모에 놓이듯 한’. 이런 수식이 붙어 있네. 뭔가 조용하고 차분한 느낌이지? 이 시의 화자, 그러니까 춘향은 조용하고 차분한 삶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 거라 볼 수 있겠네.”

“그 춘향의 마음에 효진 양이 동조한 거구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보이는군. 나비와 꾀꼬리에 붙어 있는 ‘자잘한’, ‘새끼’와 같은 수식어도 비슷하게 해독할 수 있겠군.”

“음,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작다고 느꼈던 거군요.”

“그렇지. 아마 효진 양도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닐까?”

“우리나라 최고의 HJ그룹 회장의 외동딸이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건 나나 자네가 추측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닌 것 같네. 교수님이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난 이미 시 공부를 시작하려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그들의 사적인 삶은 전혀 알지 못하네.”

“그렇군요.”

“다시 시로 돌아가 볼까? 3연은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올려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네.”

“1연에서는 바다, 3연에서는 하늘이군요.”

“‘채색한 구름’같은 자신을,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달라는 말인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없나?”

“울렁이는 건 뭔가에 흥분한 상태 아니겠습니까?”

“아까 ‘머언 바다’를 해독할 때 자네가 느꼈던 흥분과 비슷한 것 말이지?”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내 얼굴을 본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양반은 이런 식으로 나를 곤혹스럽게 하는 걸 은근히 즐기는 변태 같은 성향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했다.


“채색한 구름은 어떤가?”

“대개 하얀 구름은 좋은 의미로 쓰이지요. 그런데 채색한 구름이라, 뭔가 와 닿지 않습니다.”

“그게 이상한 점이네. 이걸 풀어내야 시에 대한 의문이 풀이게 되지. 2연과 상관관계를 생각해보면 말이야, 화자인 춘향이는 자신의 삶이 만족하지 않아. 밋밋하고 단조롭지. 그걸 ‘다소곳이’, ‘베갯모에 놓이듯 한’, ‘자잘한’ 등으로 수식한 거고.”

“아, 그럼 ‘채색한 구름’은 색다른 삶이라 해독할 수 있는 건가요? 만약 그렇다면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달라는 건 색다른 삶에 대한 동경이 되겠네요.”

“훌륭하네, 완승 군.”

“그럼 4연에서 ‘서으로 가는 달’은 뭘까요?”

“춘향도 ‘달’처럼 ‘서(西)’로 가고 싶었을 테지. 그러나 ‘추천’이라는 것이 ‘그네’ 아닌가. 결국 그네에 묶여 있는 거야, 춘향은. 그러니 그녀는 달처럼 자유롭게 ‘서’로는 가지 못하게 되는 거네. 단!”


시선을 시에 고정한 채 선생님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는데, 선생님의 ‘단!’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선생님의 오른손에는 김 회장이 가져온 메모가 들려 있었다.


“효진 양은 춘향과 다르지.”


‘저는 춘향이와 달라요.’라는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춘향은 추천으로 매여 있는 몸이었으나 효진 양은 달랐다. 매여 있긴 했으나 그것이 춘향처럼 물리적으로 갇혀 있는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춘향과 달리 ‘서으로 가는 달’같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쯤하면 됐네. 정리를 해볼까? 춘향은 자신의 밋밋한 삶을 거부하고 자유를 찾고자 했어. 두근거리는 일상, 혹은 자신을 두근거리게 하는 어떤 것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녀는 그네라는 공간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거야.”

“효진 양은 그런 춘향의 삶에 공감을 했구요.”

“그러나 효진 양은 춘향과 다른 선택을 했지. 그녀는 ‘그네’라는 굴레를 벗어나 다른 삶을 살기로 결정한 거야.”

“아, 이제 효진 양이 왜 집을 나갔는지 알 것 같네요. 김 회장님께 연락을 드릴까요?”

“아니, 내가 직접 하겠네. 은사님을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되지.”


김 회장과 전화를 끊은 선생님은 아무 말 없이 시집을 보다 눈을 감았다 창을 보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 행동이 서른 번 정도 반복하자 김 회장이 차가 앞뜰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혼자서, 그러나 처음 방문과 달리 약간 흥분한 발걸음으로 사무소로 들어왔다.


“그래, 어떻게 됐나?”

“교수님, 혹시 효진 양이 유학을 했었습니까?”

“그렇지. 대학 때까지 현대무용을 했었네. 독일에 유학을 했었지. 그런데 자네도 알다시피 내 유일한 혈육이 효진이 하나이지 않나? 어릴 때는 저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었지만 나도 조금씩 나이가 들고 저도 이제 경영 공부를 할 때가 된다고 판단했다네. 그래서 S대 MBA과정을 밟고 있었네.”

“그 과정에서 따님은 큰 불만 없었구요?”

“큰 불만 없었어. 고분고분 독일에서 한국으로 귀국을 했고 준비과정도 순조롭게 따랐네. 그런데 설마 그것 때문에 효진이가 연락을 끊은 건가?”

“아무래도 큰 불만이 있었지만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그 말을 차마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교수님 말씀대로 착한 딸이니까요.”

“무슨 말인가?”


선생님은 「추천사」에 적힌 메모와 시를 해독한 내용을 김 회장께 상세하게 풀어주었다. 김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숙이기도 하면서 끝까지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효진이는 지금 어디 있을까?”

“아마 서방으로 갔을 겁니다. 마침 독일에 유학을 갔다고 하니 독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서으로 가는 달’이 그 증거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뭔가?”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입니다. 따님은 가슴 뛰는 일을 하러 그곳에 간 겁니다. 그러니까 교수님의 경영 수업은 따님의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은 적어도 아니었나 봅니다. 현대무용을 전공했다고 하니 그녀의 가슴 뛰는 일은 춤이 아닐까요?”

“음…….”


김 회장은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을 이었다.


“다른 애들보다 조금 늦게 시작했지만 워낙 열심이라 다른 애들을 금방 따라 잡았네. 독일 유학도 내가 보낸 게 아니라 국비를 지원받아 간 거야. 거기서 장학금도 받고 괜찮은 대회에서 입상도 했다네. 난 무용을 잘 모르지만 실력은 좋을지도 모르지. 그러나 애초에 난 그 애가 무용을 계속하길 바라지는 않았네. 독일 유학도 경영학을 복수전공하겠다는 조건 하에 허락한 거였어. 딸애도 거기에 동의를 했고 말이야. 경영학 성적도 괜찮았던 걸로 아네. 원래 애비 말을 잘 듣는 착한 애였으니.”

“그런데 무용을 포기하지 못한 거군요.”

“그러게 말이야.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야.”

“네, 교수님께서 제가 시를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하신 말씀이시지요.”


선생님의 말을 들은 김 회장이 호탕하게 웃었다. 특유의 호탕한 웃음이었다. 김 회장을 보며 선생님도 미소를 지었다.


“그랬지. 맞아, 그랬어.”


김 회장은 두 손으로 커피 잔을 쥐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했고 우리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남은 커피를 마신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쩌면 나는 우리 딸애를 너무 몰랐던 것 같군. 20년 전 자네를 몰랐던 것처럼 말이야. 독일 쪽에 우리 직원이 나가 있으니 수소문을 좀 해야겠어. 자네 생각이 맞다면 찾는 건 그리 쉽지 않을 테지. 고맙네, 설 탐정.”

“되도록 빨리 효진 양과 연락이 닿기를 바랍니다, 교수님.”

“의뢰비는 나중에 우리 양 비서가 처리할 거네. 연락이 올 테니 최대한 많이 부르게.”


호탕한 웃음과 함께 나는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 커피 내리는 솜씨가 일품이더군. 종종 커피 마시러 와도 되겠나?”

“물론입니다. 회장님. 언제든 오십시오. 물을 끓여놓고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커피잔을 흔들며 말했다.


“어찌 말투가 자네 선생과 닮아가는구먼. 하하.”


김 회장은 선생님과 나에게 악수를 건넨 후 사무소를 떠났다. 김 회장, 아니 딸의 행방을 찾은 아버지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커피 향처럼 그윽하게 퍼졌다. 그렇게 긴 하루가 지나갔다.


며칠 후 김 회장과 그의 딸이 함께 사무소를 찾아왔다. 효진 양은 큰 키에 늘씬하면서도 무용으로 단련된 탄탄한 몸매를 가진 서구적 미인이었으나 겉모습과는 달리 조신하고 예의가 발랐다. 선생님께 공손히 인사 한 후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는 사과의 인사, 그리고 선생님 덕분에 아버지가 자신의 꿈을 인정해주었다는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독일에서 활동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룹 승계에 대해서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네. 사람은 저 하고 싶은 걸 해야 행복하다는 걸 알았네. 자네 덕에 말이야.”


김 회장은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자네도 나랑 있을 때보다 이 친구와 있을 때 얼굴이 더 좋아 보이는군.”


사무실 문을 나가며 효진 양은 아버지의 팔짱을 꼈다. 김 회장은 살짝 놀란 듯 딸을 한 번 쳐다봤지만 이내 자신의 손을 팔짱을 낀 딸의 손등에 포개었다. 어느새 창밖에는 붉은 태양이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부녀의 등을 타고 조용히 넘어가고 있었다.


- HJ그룹 딸 가출사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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