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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Oct 15. 2020

HJ그룹 딸 가출사건 上

수록시: <추천사>, 서정주

며칠 간 조용한 하루가 지속되었다. 선생님은 늘 하던 대로 산책을 가셨고 나는 2층 내 방 책상에 앉아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산책에서 돌아오신 선생님이 커피를 드시고 싶다고 해 주방으로 내려가 케냐AA 원두를 글라인더로 갈았다. 커피향이 사무소를 채웠다. 케냐커피의 특유의 신맛과 적당한 바디감이 좋았다. 


“맛있군. 난 커피 맛을 느낄 정도로 미각이 발달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커피 맛을 모른다는 양반이 커피가 맛있다니, 이건 칭찬인가요, 선생님?’이라 생각하며(그러나 칭찬이라 믿기로 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 바디감이 묵직하게 들어왔다. 싱크대 서랍에서 어제 먹다 남은 쿠키를 몇 조각 꺼냈다.

그때, 육중한 무게에 밟히는 자갈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에 의뢰인이 들어온 모양이군. 차를 더 준비해야겠네, 완승 군. 쿠키도 몇 조각 더 꺼내고 말이야.”


창밖에는 검은 세단에서 말쑥한 정장 차림의 사내가 내려 차 뒷문을 열었고, 이윽고 화려한 회색 정장을 입은 노년의 신사와 검정색 바지정장을 단정하게 입은 여성이 내렸다. 정장 사내가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가자 노신사는 정장 여성에게도 들어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여성이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차에 오르자 사무소 쪽으로 몸을 돌린 노신사는 고개를 들어 사무소를 훑어보고는 입을 꾹 다문 표정으로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 의뢰인이었는지 선생님은 소파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갔다. 직접 의뢰인을 맞이하려는 것인 듯했다.


“조금 일찍 도착하셨군요.”

“오랜만이네, 설 탐정.”


선생님을 본 노신사는 활짝 웃으며 악수를 청했고, 선생님도 미소로 화답했다. 일면식을 넘어선, 꽤나 깊은 친분이 있는 관계인 듯했다. 둘은 응접실 소파에 앉아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눴다. 마침 다 내려진 커피를 대접하려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아, 이 친구가 자네 조수인가?”

“네, 조수이자 제자입니다. 이 친구가 내린 커피 맛이 기가 막힙니다.”

“설 탐정 자네는 커피 맛을 모르잖는가? 그런데도 커피 맛이 좋다고 하는 걸 보니 이 친구 실력이 보통은 아닌가보구먼! 하하하”


신사는 호탕하게 웃었고 선생님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칭찬이 맞긴 했나보다.)


“완승 군. 인사드리게. HJ그룹 김만전 회장님이네. 내가 이 분께 신세를 진 적이 있었지. 보기와 다르게 좋은 분이네.”

“자네 선생은 항상 칭찬을 이상하게 하는 버릇이 있지? 하여간 의뭉스러운 인물이야. 하하”


김 회장은 특유의 호탕한 웃음으로 내게 악수를 청했다. 상대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드는 웃음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게다가 한 번도 말로 꺼내본 적 없는 선생님의 버릇(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애매한 선생님의 말은 항상 혼란스럽다.)을 막상 남의 입으로 들으니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는 느낌이 들어 눈치 없이 크게 웃었다가 선생님을 힐끗 보았다. 선생님은 노신사를 보며 여전히 미소를 짓고 계셨다.

효진금융투자를 모태로 한 HJ그룹의 김만전 회장은 S대 경영학과 교수를 그만두고 금융계로 뛰어들어 ‘투자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놀라운 투자 수완을 보였고 지금은 금융업을 넘어 부동산, 건설, 패션 쪽에도 진출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둔 대기업의 총수이다. 선생님은 김 회장이 금융학계의 거장으로 이름을 날리던(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교수시절에도 경제잡지 포춘이나 포브스에 몇 번 실렸고, 최근에는 경제학자이자 기업인으로 다보스 포럼에도 참석했다고 한다.) 경영학과 교수시절 제자였고 김 회장 말로는 자신이 키운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성과를 보인 학생이었다고 했다.


“자네 설마, 자네 선생이 의뢰인도 몇 없는 시 해독만 가지고 이런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는 순진한 생각을 한 건 아니겠지? 이 친구는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 최고의 투자가였다네.”


선생님이 경영학과를 졸업했다는, 게다가 ‘투자의 신’의 제자였다는 사실에 받은 충격이 얼굴에 적잖이 드러났는지 김 회장은 나에게 실눈을 뜨며 장난스럽게 물었다.(사실 더 충격인 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선생님의 학력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무소의 살림은 선생님이 맡고 계시기도 하거나와 나는 선생님이 의뢰인으로부터 의뢰비를 얼마나 청구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기에 사무실 운영비는 으레 의뢰비로 충당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김 회장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비록 김 회장은 ‘설마’라고 했지만)


“이제 선생님께 배운 걸 써먹는 건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숫자만 쳐다보는 것보다 재밌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래서 자네가 나를 배신하고 떠난 거겠지.”


김 회장이 호탕하게 따라 웃자, 선생님은 커피 잔을 입에 대며 잔에 담긴 커피처럼 잔잔한 미소 지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김 회장은 선생님이 자신을 떠난 것을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는 고작 이런 일이나 하려고 나를 떠난 건가 싶긴 했었는데 말이야……”


갑자기 웃음을 멈춘 김 회장이 자리를 고쳐 앉은 후 말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진지한 말투였다.


“자네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왔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내 딸을 자네도 잘 알겠지? 효진이라고.”

“네, 이제 제법 컸지요? 나이가……”

“올해 스물 다섯이네.”

“벌써 세월이 그렇게 됐군요. 아마 ‘효진금융투자’가 따님 이름을 딴 거였지요?”

“맞네, 결혼한 지 십 년 만에 얻은 귀한 딸 아닌가. 각별히 소중한 아이지.”

“그런데, 따님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김 회장은 정장 상의 안쪽 포켓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얇은 책인 걸로 봐서 시집이었다.


“<<서정주 시선>>이군요. 1956년이 발간된 거 같은데, 그 원본입니까?”

“그렇다네. 효진이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 즈음인가 갑자기 이 시집을 구해달라고 해서 일본까지 사람을 시켜 어렵게 구했었지. 초판본이라네.”

“그런데 이 시집은 어쩐 일로?”

“실은 효진이가 며칠 전부터 연락이 두절되었네. 내 서재에 이 시집과 이런 메모 하나를 남기고 말이야.”


김 회장은 선생님께 엽서 한 장을 보여주었다. 젊은 여성 특유의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쓰인 문장 하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빠, 저는 춘향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애비 말을 참 잘 따르던 아이였는데 특별한 말도 없이 의미를 알 수 없는 편지 한 장 남긴 채 사라졌으니 참 답답한 노릇이네.”


딸의 잠적, 이것이 김 회장이 사무실로 들어오기 전 입술을 꾹 다문 표정을 지은 이유였다. 그는 머리가 아픈 듯 왼손을 이마에 대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나를 좀 도와주면 좋겠네. 어떻게든 사례는 하지.”

“교수님 따님 일인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살펴보고 단서가 나오면 즉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김 회장이 돌아갔다. 딸이 없어졌는데도 그렇게 호탕하게 웃을 수 있는 태도는 과연 대기업의 총수다웠지만 그 역시 한 사람의 아버지였기에 그 웃음을 마지막까지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무소 앞뜰의 자갈을 밟으며 돌아가는 세단이 내는 바드득 소리는 타인, 그것도 제자 앞에서 겨우겨우 참아내는 그의 울음소리 같았다.


“걱정이 많이 되시겠죠?”

“HJ그룹의 금지옥엽이 사라졌으니 아무래도 그렇겠지. 서둘러야겠네.”


안경을 고쳐 쓴 선생님은 장갑을 낀 손으로 시집을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펼쳐보았다. 오래된 시집이라 각별한 주의가 필요했다. 천천히 시집을 보시던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시집을 톡톡 치며 말했다.


“여기에도 메모가 있군.”


향단(香丹)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 듯이,

향단아.


이 다수굿이 흔들리는 수양버들나무와

베갯모에 뇌이듯한 풀꽃더미로부터,

자잘한 나비 새끼, 꾀고리들로부터,

아주 내어 밀 듯이, 향단아.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나를 밀려 올려 다오.

채색(彩色)한 구름같이 나를 밀려 올려 다오.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 다오!


서(西)으로 가는 달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그렇게 나를 밀려 올려 다오.

향단아.

- 서정주, <추천사>



시가 끝나는 부분에 아까 메모지와 같은 글씨체로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이 시를 읽은 후, 효진 양이 쓴 메모 같았다.


춘향아, 너도 나와 같구나.


“음, 이게 단서가 되겠군요. 그런데 이 시가 어떤 시이기에 그녀가 두 번이나 같은 메시지를 남긴 걸까요?”

“이 시를 해독하면 답은 나오겠지. 그런데 말이야, 완승 군.”


이크, 질문이다.


“이 시의 화자가 누구인지 알겠나?”

“향단이를 부른 걸 보니까, ‘춘향’이 아닐까요?”

“그렇지. 이 시는 서정주 시인이 ‘춘향의 말’이라는 부제를 붙여 쓴 연작시 중 하나라네.”

“그럼 이 시는 춘향의 입장으로 쓴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리고 효진 양은 이 시의 춘향에게 감정을 이입한 거고 말이야. 1연부터 힌트가 나오는데…….”

“무슨 힌트 말이죠?”

“효진 양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힌트 말일세.”


조금씩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어서 말을 해달라는 듯이 선생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부탁인데 부담스러우니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말아야주게. 얼른 시작하지. 1연에서 화자는 ‘향단’에게 ‘그넷줄을 밀’어 달라고 말하고 있네.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말이야.”

“아! 그럼?”


뭔가 번뜩이는 깨달음이 왔다. ‘효진 양은 바로 여기 있다!’라는 확신으로 뒷덜미가 달아올랐다. 


“그녀는 ‘머언 바다’로 간 거군요?”

“좋은 시도였네, 완승 군. 하지만 세상 일이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는 게 문제네.”


너무 성급한 결론을 내려버린 듯했다. 방금 전 온몸에 몰려왔던 흥분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걸 느꼈다.


- 下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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