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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락 이강휘 Oct 15. 2020

에필로그

수록시: <우리가 물이 되어>, 강은교

오후 두 시 삼십 분. 선생님은 언제나처럼 응접실 한 가운데 놓인 사인용 면피가죽소파의 왼쪽 끝에서 팔을 기댄 체 앉아 있다. 그의 왼손에 들린 책은 분명 시집일 것이다. 누구의 시집인지는 내가 선 곳에서는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눈을 감는다. 이제 십 초 뒤에 눈을 떠 말을 걸겠지. 셋, 둘, 하나,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완승 군.”


빙고!


“네, 선생님. 무슨 일이신지?”

“밖에 빗소리가 들리는군. 오늘 비가 온다고 했던가?”


나는 주방에서 물을 뜨려다 말고 선생님 왼편에 있는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늘은 맑은데 호수 옆 이팝나무와 창 사이에서 바람에 흩날리는 가는 빗방울이 보인다.


“비가 올 거라는 예보는 못 들은 것 같은데, 하긴 요즘 일기예보를 믿을 수가 있나요.”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게 봄비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음, 그러고 보니...”


소파에 앉아 눈을 감았다가 뜨면 십중팔구 과제가 나온다. 게다가 ‘그러고 보니’라면 필히 책을 준비해야할 일이 생긴다. 물을 따라놓은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책장 쪽으로 몸을 틀었다.


“비도 오고 하니 「우리가 물이 되어」라는 시가 떠오르는군. 좀 읽어주겠나?”


선생님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착한 계단 앞에 서서 선생님께 여쭈었다.

“선생님, 말씀하신 그 시, 누가 쓰신 거죠?”

“강은교 시인이라네. 계단 아래 네 번째 책장 다섯 번째 칸에 꽂혀 있을 테니 계단을 오를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겠군. 아, 시 제목과 같은 시집을 찾으면 되네.”


선생님과 내가 머무는 사무소는 자작나무로 짠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1층은 응접실과 주방이 있고 2층에는 선생님과 내 방이 있다. 선생님과 내 방 사이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만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한 새로 들인 책들이 가득 놓여 있어 차는 주로 응접실에서 마신다. 창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공간이 책장으로 짜여있고 책장마다 책이 그득그득 꽂혀 있다. 곳곳에 책이 있으니 사무소 전체가 거대한 서재인 셈이다. 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보이는 벽면부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옆면까지의 책장에는 오직 시집으로만 채워져 있다. 선생님이 기존에 소장하고 있는 책은 물론이고 새로 들여오는 시집도 선생님이 책장에 손수 꽂으신다. 주제별이나 가나다순으로 정리된 것이 아니어서, 처음에는 책을 찾아오라는 선생님의 심부름을 할 때면 시간이 많이 걸렸었다. 그러다 차츰 요령이 생겨 책의 위치를 정리한 목록을 따로 만들어두고 찾으실 때마다 목록을 참고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만의 책장 정리방식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내가 찾기 쉽게 책을 정리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도 그런 믿음 때문이었다. 함부로 손은 댔다가 선생님이 혼란을 겪으실 수도 있는데다가 나는 주인의 허락 없이 함부로 물건을 손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지레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책을 찾다가 불현듯 궁금해져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 선생님은 어떻게 이 많은 책의 위치를 다 아시는 건가요?


주제별로 정리를 해뒀다든지, 발간 연도별로 정리를 했다든지 하는 정리법, 아니 적어도 머릿속에 방을 만들어 그걸 기억한다든지 하는 묘수(이렇게 기억하는 암기법이 있다는 것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 응? 그냥 알 게 되던데? 자네는 아닌가?


네네, 그러시겠지요. 그냥 천재인거다, 저 양반은. 정리 체계 따위는 나 같은 범인(凡人)들에게나 필요한 거였다. 맥이 빠졌다.


- 보통 사람은 그렇지 않답니다, 선생님.

- 그렇군. 책을 찾을 때마다 뭘 자꾸 들쳐보기에 난 자네가 특별히 기억력이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네.


남을 저렇게 품위 있게 무시하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물론 선생님은 나를 무시하려는 의도를 가지실만한 분은 아니다.) 어쨌든 그 이후로 선생님이 나에게 책을 찾아오라고 시킬 때마다 뒤적거렸던 책 정리 목록을 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물론 내 얘기다.)의 입장을 고려하여 책의 위치를 알려주시기 때문이다. 무시는 당했지만 대신 편의를 얻었으니 질문을 한 성과는 있었던 셈이다.


“찾았으면 읽어주겠나?”


선생님은 관자놀이에 왼손 검지를 대고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를 낭독하는 내 목소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자랑은 아니지만(이어서 바로 말하겠지만 정말이지 결코 자랑이 아니다.) 선생님이 나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내 시를 읽는 목소리 때문이라 하셨다. 감정이 들어 있지도, 그렇다고 없지도 않은 순수함. 그것이 내 목소리의 매력이라 하셨다. 그리곤 이 말을 덧붙이셨다. 


자넨 시를 가슴으로 읽지 않아. 그래서 순수하지.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보지 않아서 이 말이 칭찬인지 욕인지 난 아직 잘 모른다. 선생님의 칭찬은 이런 식이다.(칭찬이 아닐 수도 있다.) 칭찬인 것 같기도 하고, 비난인 거 같기도 해 애매해 곧바로 반응을 보이기 어렵다.(다시 말하지만 선생님은 남을 비난을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헷갈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고객들한테도 가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데, 그럴 때마다 어쩌면 이 양반은 멍해 있는 상대의 표정을 즐기는 변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 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



“좋은 시군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런 식의 반응은 곤란하네, 완승 군. 시는 어떻게 봐야한다고 그랬지?”

“‘톺아본다.’겠지요?”

“그렇지. 꼼꼼하게 살피게. 시인은 반드시 작품 속에 근거를 남긴다고. 완전하게 비밀스러운 시는 없는 법이라네. 어때, 해독해보겠나?”


시 해독에 관해 선생님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시는 톺아보는 것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선생님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톺아본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몰라 얼른 방으로 가 사전을 찾았다. 


톺아보다: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보다.


선생님이 시를 해독하는 과정은 미궁에 빠진 사건을 수사하는 것과 비슷하다. 사무소를 웬만한 도서관 못지않게 책으로 채우면서도 끼니 걱정을 하지 않는 것도 이런 선생님의 능력 덕분이다. 사람들은 선생님께 시 해독을 의뢰하고 우리(거의 대부분 선생님이 하시지만)는 그 시를 해독하고 그들에게 일정한 보수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일은 ‘시(詩) 추리’라고 부르고 사람들은 선생님을 ‘시 탐정’이라 부른다. 보수는 오직 선생님의 판단에 달렸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같은 시라도 의뢰인에 따라 보수가 달라지는 걸 보면 적어도 해독의 난이도로 나누는 건 아닌 건 분명하다.


“일단,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요건 문제가 없이 해독이 됩니다. 날이 가물었는데 비가 오면 당연히 좋은 거니까요. 다만…….”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누군지를 살펴야할 것 같습니다. 힌트는 물이 되어 만난다는 건데, 이것만으로 ‘우리’의 정체를 밝히기는 힘듭니다.”

“계속해 보게.”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이렇게 1연이 마무리되는 걸로 봐서 이 부분은 1행의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과 비슷한 의미로 해석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이 좋은 의미였으니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르는 것도 좋은 뜻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매우 훌륭하네. 완승 군.”

“감사합니다. 2연에서도 비슷한 구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면’이라는 구조가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걸로 볼 때,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는 것이나,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 것도 모두 긍정적으로 해석이 됩니다.”

“좋네, 그런데 하나 정리하고 넘어가지. 여기까지에서 어떤 흐름이 안 느껴지나?”

“음, 어디보자.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소재가 제시된다는 것……, 물이라는 소재……, 물, 물, 물이라.”

“거의 다 왔네.”

“아! 물! 1연에서는 비, 2연에서는 강, 그리고 바다! 이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흐름인가요?”

“그렇지!”

“우리가 비 오는 소리로 흐르다가 강물에서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고 바다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메시지군요.”

“그렇다네. 시인은 자연의 흐름으로 우리의 인생사를 다룬 것이라 볼 수 있다네.”

“그렇군요.”


시 추리를 전수하는 선생님의 방식은 대개 이런 식이다. 적절한 추임새로 말을 이끌어 낸다. 내가 부적절한 해독을 할 때에도 별 다른 말없이 듣고 있는 경우도 있다. 증거가 없이 직관에 의존하면 결국 할 말을 잃게 되는데 이때의 침묵은 나를 꽤 불편하게 한다. 최대한 정적이 흐르는 일을 방지하려면 증거를 제시해가며 말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선생님.”

“왜 그러는가, 완승 군?”

“제 한계는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이건 지금까지 중요소재인 ‘물’이 긍정적으로 쓰였으니 ‘불’은 부정적이겠지요?”

“좋은 시도네. 설득력 있는 해독이야.”

“‘그런데 불로 만나려 한다.’라고 하니 좀 이상합니다. 시인은 왜 부정적인 시어인 불로 만나려는 의지를 보이는 걸까요?”


관자놀이에 검지를 댄 채 바닥 어딘가를 응시하며 내 해독을 듣고 있던 선생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완승 군?”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아, 그런 딱딱한 자세로 대하지 말게. 누가 보면 내가 자네 상관인 줄 알아.”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차렷 자세가 되어 버렸다. 이 바보, 이제부터 안 그러기로 해 놓고는 또 이러고 말았다. 버릇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질문이 있네. ‘~하려 한다.’가 꼭 의지의 의미로만 쓰일까?”


가만, ‘불로 만나려 한다.’가 의지가 아니라고? 그러면 뭐지?

정리해보자. 화자는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좋겠다고 한다. 비 오는 소리로 흐르고, 강물에 눕고 바다에 닿는 걸 원한다. 그러나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만나려 한다. 만나려 한다. 아!


“선생님!”


시선을 창 쪽으로 두고 있던 선생님이 나를 돌아본다. 내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의 무료함을 풍경감상으로 풀고 있었으리라.


“그래, 답을 찾았나?”

“네, 만나려 한다는 건 의지가 아닙니다. 그건 ‘만나려고 하는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 아닐까요? 물이 되어 만나면 참 좋겠는데, 현실은 시궁창인 거죠.”

“현실은 시궁창이라, 상당히 격한 표현이군. 하지만 자네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했네.”


시궁창은 좀 심했나? 아무튼 난관은 극복!


“그럼 ‘숯이 된 뼈’는 뭐라고 생각하나?”

“불로 인해 파괴된 어떤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대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긍정이라고? 어떤 면에서?”


그다지 크지 않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어보신다. 예전에는 그렇게 눈을 뜨면 ‘내가 틀렸나?’하면서 위축됐지만 이제는 아니다. 나도 조금 컸습니다, 선생님.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이 구절이 증거입니다. ‘불’은 부정적인 시어이지요. 시련이나 고통쯤이 될 것입니다. 그럼 ‘불타는 것들’은 시련을 겪고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대상을 쓰다듬고 있는 ‘숯이 된 뼈’는 긍정적인 대상이지요.”

“오, 조금만 더 들려주겠나?”

“네, 선생님. 뼈가 숯이 된 걸로 봐서 이 뼈는 이미 오래 전에 불에 타버린 것 같습니다. 제 해독에 따르면 고통에 시달린 대상이지요. 그런데 그런 대상이 불에 타고 있는 걸 쓰다듬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시궁창 같은 현실이지만, 아, 시궁창이라는 표현, 괜찮으십니까?”

“조금씩 마음에 들고 있네.”

“하하, 시궁창 같은 현실이지만 조금은 나아질 기미는 있는 것으로 화자는 보고 있습니다.”

“이제 거의 다 왔네.”


조금 흥분한 것 같아 숨을 내쉬었다. 쉬지 않고 말을 하다 보니 목이 말랐다. 아까 마시려 떠놓은 물이 생각났지만 해독을 끊고 싶지는 않았다. 멈추면 머릿속에 잡아 두었던 의미가 달아날 것 같았다.


“이제 4연입니다. ‘그대’는 만리(萬里), 즉 멀리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라고 했으니 아직 불이 지배하는 현실이지만 화자는 그대와 ‘흐르는 물’로 만나고자 합니다. 긍정적인 현실을 기다리는 거지요. ‘불 꺼지는 소리’는 드디어 시궁창 같은 현실을 벗어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완전히 불이 꺼진 후에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을 가진 미래를 꿈꾸고 있는 겁니다.”


말을 끝맺고 나니 입에서 단내가 났다. 거의 숨을 안 쉬고 말한 것 같다. 아까 물을 마실 걸 그랬나보다. 


“좋아, 완승 군. 아주 인상적인 해독이었네. 이제 물을 마시게.”


선생님은 웃음을 참는 듯이 왼쪽 입고리만 살짝 올라가는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만족감을 나타내는 선생님의 의사표현이다. 아, 저 표정을 보기 위해 이 책 먼지 날리는 외딴 곳에서 얼마나 많은 빨래와 설거지를 견뎌냈던가. 의기양양하게 뒤꿈치를 통통 튕기며 주방 쪽으로 가는 뒤쪽에서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라면 질문이다. 


“물, 그 ‘물’이 상징하는 게 뭘까?”


모르겠다. 나는 그저 물을 마시고 싶다.


“그냥 말해주긴 좀 그렇고, 물 한 잔 마시면서 생각을 좀 해보지 그래. 오늘 같은 날은 창밖을 보면서 마시는 것도 좋겠네.”

“네, 그런데 물에 대해서는 나중에라도 말씀해주시는 겁니까?”

“자네가 찾아보는 편이 더 흥미롭지 않겠나?”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나는 차차 찾아보겠다고 하고 이번에야 말로 물을 마시겠다는 일념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이제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으리라. 다행히 선생님은 대화를 마쳤다는 듯 다시 책을 들었다. 나는 물을 마셨다. 청량감이 몸속으로 뱀처럼 타고 흘렀다.

물을 마신 후 창밖을 봤다. 그 사이 비는 그쳤다. 넓고 깨끗한 하늘 아래 비 맞은 이팝나무 꽃들이 하얗게 몽우리 졌다. 


- 에필로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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