꿩대신 닭, 휴가 대신 쇼핑치료
1년 중 가장 두려운 2월이 시작되었다. 섬에서 산지 5년 차, 매해 2월이 되면 나는 온몸과 마음의 기운이 바닥이 나고 만다. 섬의 겨울은 길고도 지독하다. 낮게 드리운 회색 구름과 매서운 바람이 뼛속과 마음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기분이다. 그 옛날 유배지로 제주도를 선택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매섭게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미칠 듯 한 고독이 밀려오고 만다. 마음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올 마지막 잎새. 그 가느다란 잎사귀가 강풍에 위태롭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마치 나인 양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낮게 떨어져 버리곤 한다.
추운 겨울과 함께 아이들의 기나긴 겨울방학이 시작된다. 꽉 채운 두 달이란 시간을 함께 버티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왜 진작 제주를 벗어나지 못했나' 같은 후회를 한다. 찬바람이 부는 가을부터 겨울방학 한 달은 꼭 탈제주를 해야지 노래를 부르지만 여전히 나는 섬에 있다. 이번 겨울은 큰마음먹고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겠노라 결심을 하고 몇주 전부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마다 두세 시간을 투자해 꼼꼼하게 여행 지역을 선별했다. 연휴가 많던 12월, 1월 동안 열심히 살았다 자부하기에 나는 마땅히 휴식을 즐겨도 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숙소 운영을 시작하며 이곳을 찾은 여행자들의 휴식만 생각했다. 나 스스로의 휴식을 뒤로한 채 3년을 살았으니 이쯤 되면 충전이 필요하지 않은가. 아무것도 안 하고 수영장에서 물멍을 때리고 싶었다. 타인이 정리해 준 순백색의 침대 시트에 몸을 던져 그대로 잠들고 싶었다. 삼시세끼 밥걱정 안 하고 주는 데로 퍼 먹고 싶었다.
그런 열망이 더해지니 참을 수 없는 욕구가 샘솟았다. 나의 완벽한 휴식을 책임져줄 파라다이스를 찾기 위해 온라인 플랫폼을 유영했다.
'오, 박당 10 만원에 조식 포함, 원베드 풀빌라라고? 결제해!'
선예약 후결제 시스템을 활용해 나는 마음껏 내가 원하는 호텔들을 담고 또 담았다. '이왕 어렵게 나가는 거 10일 이상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 날짜도 점점 늘어나고 실현 가능한 일들로 가까워질수록 아드레 날린 이 솟았다. '이번엔 진짜 가나 봐!!' '수영복을 하나 더 사야 하나?'
이제 최종 단계인 항공 발권만 남았다. 결제 버튼을 누르면 환불도 불가하니 확실한 쇠기를 박는 순간이었다. 제주-김포-인천-나트랑...나트랑-인천-김포-제주 ...
순식간에 찬물이 쫘악 뿌려지며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래, 나 제주도에 사는 사람이지.
혼자 아이 둘과 캐리어를 끌고 저 험난한 일정을 가는 게 진짜 휴가가 맞는 것일까? 새벽에 현지 도착인데 택시를 타고 이동해야 하잖아? 리턴도 새벽 2시 비행기인데 애들 데리고 어디 가있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붙는 질문들이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휴가 한번 가기 더럽게 힘드네'
결국 잡아둔 호텔 예약도 취소하고 집 나가면 고생이지 스스로를 위로하며 풀이 죽어 있을 즘 친정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이러저러해 휴가 계획을 취소하노라 속상해하는 나에게 "그럼 그 여행비의 20% 정도만 너한테 써봐. 옷도 사고 갖고 싶던 것도 사면 기분이 훨씬 좋아질 거야" 라며 현자의 답을 남겨 주었다. 자고로 엄마말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하지 않던가. (이번엔 지체 없이 결제 클릭을 했다)
며칠 동안 하늘에선 눈이 쏟아져 내렸다. 섬이라 눈이 늦게 내리는 건지, 입춘이 되었는데 눈치도 없이 눈이 내린다. 따뜻한 햇빛이 그립다 생각하며 뜨거운 차를 부여잡고 몸속으로 들이켜 본다. 내 몸은 지금 나트랑 리조트 선베드에 누워있다 생각하며 뜨끈하다~따뜻하다~최면을 걸고 남은 2월 잘 버티자 스스로를 다독인다.
띵똥, 때마침 문밖으로 금융치료제가 도착을 했다. 푸릇한 잔디색 러닝화를 바라보며 봄날의 제주를 기다린다. 겨울이 끝나길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