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게 될 줄이야.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는 삶을 산 지 오래이다.
스스로가 잠에 빠져있는 것이 너무도 지루한 나머지 의식을 깨워 잠을 몰아내는 삶을 산지도 오래이다.커피를 끊으면 잠을 깊이 잘 수 있다고들 하지만 , 언제부터인지 모를 이 오랜 습관을 순식간에 끊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와 같은 질문이랄까?)
몇 해전 큰아이의 조리원 동기 가족과 제주 동쪽을 여행하게 되었다. 처음 아이를 낳아 모든 것이 생소하고 두렵던 시기를 함께해 준 언니들과의 인연은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우리들의 인연을 이어지게 해 준 매개체 역시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잔 에서부터였다. 좁고 답답한 수유실에서 나오지도 않는 모유를 먹이느라 고군분투하고 있던 우리 셋의 입에서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잔하고 싶다"가 구원의 단어처럼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수면부족과 꽁꽁 싸맨 온돌 아래 간절한 건 단 하나 '아이스커피' 뿐이었다.
그렇게 어린 자녀들을 들춰 안고 우리는 틈나는 대로 만나 아이스 라테를 들이키곤 했다.우리의 만남에 늘 커피가 따라다녔기에 일주일간의 제주도 합숙기간 동안 동쪽지역에서 맛 좋다 소문난 커피들을 다 마셔 버리겠노라 다짐했다. 그러나 짐을 풀고 있는 식탁 위에 떡하니 올라온 건 디카페인 커피 캡슐이었다.
"이게 뭐야? 디카페인 이라니.. 이걸 마실 바엔 차를 마셔"
"응.. 그럴 줄 알고 생강차도 챙겨 왔는데.."
나는 알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며 이런 녹색 (디카페인) 캡슐과 전통차가 언니들의 가방에서 나온 연유를 들어야만 했다.
"요즘 커피를 마시면 손이 떨리더라고"
"맞아.. 커피 마시면 하루종일 힘이 들어서 나도 안마시게 되더라고"
10년간 나와 함께 커피를 즐기던 친애하는 두 동갑내기 여인들을 떠나보내며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늙어서도 커피를 즐기는 멋쟁이 할머니가 되고 싶다'라는 작디작은 소망을 마음 한구석에 품으며 변함없이 커피로 아침을 여는 삶을 그 후로도 몇 년간 지속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탈 커피 선언을 하던 그 당시 그녀들의 나이가 되어 버린 나에게, 우습게도 그들이 이야기한 '커피 때문에 손 떨려 주저앉았네' 증상이 발현되고 말았다.
평범한 아침이었다. 해안 도로를 신나게 달리고 유난히 날도 좋고 기분도 좋고 컨디션은 무척이나 최상인 상태였다. 달리기를 마치고 수고한 나에게 커피를 수혈하던 습관도 당연한 그런 날이었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목을 타고 몸에 퍼지는 기분이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는데 순간 핑 도는 기분을 느꼈다. '이상한데?' 한걸음 한걸음 땔 때마다 몸이 부르르 떨리고 진정이 되지 않았다.
처음 느껴보는 몸의 이상 감각들에 겁이 덜컥 났다. 조금 쉬면 나아지겠지 하며 쉬었지만 그날의 감각은 오후까지 지속되었다. 그런 경험을 한번 치르고 나니 , 다음날 아침에도 그다음 날 아침에도 커피를 마실 수가 없었다. 커피를 끊었지만 얕아진 수면은 습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커피 때문에 잠을 자주 깨는 건 아니었다는 것이 위안이 됐다) 그후로도 방심하고 마신 커피는 어김없이 나를 주저앉히고 말았다. 핑 돌다 부르르 떨려오는 증상이 두렵기까지 했다. 그리고 슬퍼졌다.
추운 겨울아침 눈을 뜨면 따뜻한 커피 한잔이 더욱 간절해졌다. 크리스마스 연휴 동안 아이들과 부대끼며 빈틈없이 지낸 나에게 위로의 커피 한잔이 필요했다. 결국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해안가로 내려와 익숙한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고민을 하곤 '디카페인' 커피를 주문했다. 몇 년 전 식탁 위에 디카페인 커피캡슐을 슬며시 올려두던 조리원 동기 언니가 생각났다. 그때의 그녀들이 어떤 심정으로 디카페인 커피라도 마셔야 했던 건지 이제야 동감하게 된다. 문제는 이 디카페인 커피마저도 떨림증상이 미세하게 온다는 것이다. 큰일이다 카페인 루저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나의 유일하고도 확고한 취미이던 커피 사랑이 이렇게 멀어지고 있다.
나이가드는 것을 이렇게 몸으로 느껴버리는 순간이 오게 될 줄이야. 마흔 중반에 접어드는 2024년 12월 말.
이제는 새해 소원이 무병장수, 무탈일상, 커피한잔이 되어버리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