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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욱 Aug 03. 2022

결국 엄마 아빠

제1부: 칠레 워킹홀리데이

월요일부터 토요일, 매일 똑같이 아침 6시 30분에 일어나 빠르게 준비한 후 7시 30분에 집을 나선다. 근무하는 가게까지는 걸어서 약 50분. 8시 30분까지 도착해야 하기 때문에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8시 30분부터 근무 시작. 도매 손님이 가장 많은 아침 타임이 지나가면 어느새 점심이다. 칠레 가게들 특성상 캐셔는 자리를 비울 수 없기 때문에 가져온 도시락을 전자레인지 데워 계산대에 앉아 밥을 먹는다. 소매 손님이 몰리기 시작하는 2시. 망부석처럼 약 12시간을 계산하고 있다 보면 퇴근이다.


출근할 땐 마음은 무거운데, 몸은 가볍고 퇴근할 때는 마음은 가벼운데 몸은 무겁다. 빨리 걷고 싶은데 다리가 쑤신다. 힘겹게 집에 도착. 점심에 먹었던 메뉴 그대로 소시지 하나랑 토마토소스에 볶은 양파와 함께 밥을 먹는다. 마지막으로 씻고 일기 쓰고 취침.


쳇바퀴 같은 캐셔 일을 하면서 내가 평균적으로 사용한 한 달 생활비는 월세를 제외하고 약 6만 원에서 10만 원 안팎이다. 교통비도 아끼고자 안전한 길거리가 아니어도 몇 시간을 무조건 걸어 다녔다. 마트에선 가장 싼 쌀과, 가장 싼 소시지와, 가장 싼 빵과 파스타면을 샀다. 그게 가장 싸고 맛있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때문에 세 달 동안 나의 주식은 빵/밥/파스타, 토마토소스/양파, 소시지였다.


내가 힘들었냐고? 오히려 반대다. 행복했다.


한 달에 약 170만 원의 넘는 돈을 받는 두 번째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목표를 잡았다.



1차 목표: 중남미+미국 여행(약 500만 원 필요) / 2차 목표: 세계일주(약 1500만 원 필요)




1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남은 기간 동안 약 한 달에 약 100만 원 넘는 돈을 모아야 했고, 2차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약 200만 원을 모아야 했다. 그래서 1차 목표를 위해 최대한 아꼈다. 몇 달을 그렇게 먹었는데 목표가 있으니 질리지 않고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일이 다 끝나갈 때쯤 통장에 500만 원 정도가 모였을 때 목표를 달성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나 자신이 대견했다.


그래서 남들이 우려하고 걱정하던 모습에 떳떳하게 잘 적응했다고, 나 혼자서도 잘 해냈다고 보이고 싶어서

1차 목표를 달성한 날 친구들 몇몇에게 연락해서 자랑했다. 친구 한 명과 보이스톡으로 전화하며 이제 까지 있었던 나의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나 자신이 얼마나 혼자서 잘했는지 열심히도 떠들어댔다.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수화기 너머로 나지막이 “좋아 보인다. 나도 워홀 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가면 되지 왜 안 가냐”라고 아무 생각 없이 답했다.


“우리 집은 어머니 혼자서 일을 하셔. 내가 빨리 취업해서 돈 벌어야 해”


내 말을 뒤로 친구가 한 말에 나는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기억이 안 날 만큼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어 급히 전화를 끊었다. 어머니를 혼자 모시는 친구 사정에 워킹홀리데이는 사치였다. 2년 군 휴학을 마치고, 1년간의 추가 휴학은 애초에 친구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에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강남 한복판에 발가벗겨져서 내던져진 사람 마냥 부끄러워졌다.


나는 내가 잘나서, 내가 운이 좋아서 잘 적응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시작점부터 나는 부모님 덕분에 여기 와 있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그늘에 벗어나 ‘자립해서 외국에서 살아보고자’ 했던 버킷리스트는 애초에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나는 칠레 땅을 밟는 것과 동시에 ‘내 걱정’만 하면 됐다. 내가 오늘 뭘 먹을지, 내일 뭘 먹을지, 그것만 신경 쓰면 됐다. 하지만 친구는 아니었다. 친구는 오늘 어머니가 무엇을 드시는지, 내일 뭘 드실 건지도 걱정을 해야만 했다. 그 차이가 친구는 한국에 남아있고, 나는 칠레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놓칠 수 있었던 걸 깨닫게 해 줘서 고맙다고 전했다.‘친구 상황에 비해 내가 더 좋은 상황임을 깨달은 무례한 감사’가 절대 아니며, 나 혼자서 해낸 일이라 착각할 수 있었던 ‘무지’를 친구 덕분에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어서 너무 고맙다고 말했다.


‘스스로’라는 이룰 수 없었던 버킷리스트를 이루자고 칠레에 왔구나 생각하니 허탈한 웃음이 났다. 내가 칠레에 온 이유가 어쩌면 자립해서 외국에서 살아본다는 게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주제넘은 버킷리스트였는지 깨달으러 온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분명 떠나지 않았으면 분명 몰랐을 것이다. 내 생각만 해도 된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결국, 엄마 아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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