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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딩코치 Young Jun 14. 2021

나는 딸의 사춘기가 미리 두려웠다

 내가 아이에게 공감을 잘 못하는 엄마라는 걸 아름이의 말을 통해 깨달은 후부터 나는 아이의 사춘기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의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나는 아이의 시선으로 내 아이를 이해하고 싶어서 책장 맨 위칸에 꽂아 둔 나의 10대 시절에 쓴 일기를 꺼내 읽어보기도 했다. 




 오랜만에 나의 사춘기 시절 일기장을 꺼내 읽어 보니 그때만큼은 아니지만 내가 그 당시 느꼈던 감정적인 내 모습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일기장에는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과 생각대로 열심히 하지 않는 내 모습에 나를 스스로 질책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어느 날은 부모님께서 사랑의 잔소리를 해주셨나 보다. 그러나 나는 부모님의 말씀을 잔소리로만 여겼다.


 사춘기 때 내가 써놓은 일기는 지금 다시 읽어보기 민망스러울 정도로 부끄러운 일기장이지만 엄마가 된 내가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 할지 고민될 때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마음과는 달리 아이랑 함께 있을 때 생각한 대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잔소리가 많다고 스스로 느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서 저녁을 먹고 자는 시간까지 시간에 쫓긴다는 핑계로 빨리 밥을 먹으라는 말과 숙제했냐는 잔소리가 입에서 멈춰지지 않았고 아이를 재우고 내가 아이에게 쏟아부었던 말에 대해 늘 미안했다.


 부모세대보다 사춘기가 빨라진 요즘 아이들. 나는 아이가 사춘기를 겪으며 마음의 갈등이 생길 때 결정적인 순간에 어른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지 않고 숨기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다. 나의 잔소리로 인해 아이가 내가 하는 말에 귀를 닫으면 어쩌지라는 조바심이 났다. 아이들이 한창 자신의 꿈이나 진로를 향해 이런저런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할 때 분노의 사춘기를 겪으면서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감정적인 사춘기 때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 부모와 사이가 멀어지게 되면 몇 년이란 시간을 거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물론 그 나이에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제자리에서 쉬었다 갈 수 있고, 돌아갈 수도 있지만 부모와 겪는 감정적인 시간들로 내가 아이에게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큐레이터 일을 하면서 아이에게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기에 내가 엄마로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래서 아이와 내가 함께 좋아하는 것을 하려고 했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아이도 나도 함께 행복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꼭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려고 노력했다.




 매일 자기 전, 아름이에게 책을 꾸준히 읽어주었더니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항상 자기 전에 읽을 책을 갖고 방으로 들어간다. 내가 생각해도 책 읽어줄 때만큼은 아름이에게 그렇게 친절할 수가 없었다. 등장인물에 따라 목소리를 바꾸어 가며 책을 읽어주니 아이도 좋아하면서 재미있는 장면은 또다시 읽어보라고 말했다. 내가 책을 읽어줄 때 아름이가 그렇게 해맑게 웃으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 기뻤다.


 아름이가 태어난 지 100일이 되기 전에 누워 있을 때부터 책을 읽어주었더니 아름이는 자기 전에 책을 읽고 자는 좋은 습관이 몸에 배었다. 때로는 저녁 먹고 숙제를 봐주다 잘 시간이 너무 늦어 책을 읽어주는 오디오 CD를 틀어놓고 들으면서 잠에 든 적도 많았다. 그리고 아름이는 무언가 자신의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해서 집에서 함께 요리를 해서 먹었다. 때로는 가끔 카페에 가서 평소에 잘 사주지 않던 아이가 좋아하는 음료를 시켜 주기도 했다. 




 사실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제일 먼저 아이의 정서를 공감하는 말을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이를 공감하는 말보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먼저 말하는 것이 익숙하다. 당연히 부모로서 아이에게 공감하는 말을 해주어야 하지만 나는 그게 잘 안 되는 엄마이다. 그래서 공감하는 말을 생각하고 연습했지만 내 모습이 쉽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래서 엄마로서 내가 못하는 것을 잘하려는 노력도 해야 하지만, 평소에 노력하지 않아도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으려 했다. 그리고 전보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초등학교 4학년이 지나면서 내가 말하기 전에 아름이는 스스로 숙제도 하고 자기가 할 일을 찾아서 하게 되었다.


 부모는 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까지는 공부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것도 알려주고 계획표도 함께 점검해주는 것이 좋다. 그렇지만 무엇이든 자기가 알아서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커지는 중학생부터는 아이 스스로 계획을 세워 공부하라고 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아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공부에 대한 잔소리는 일절 하지 않았다. 아는 분 중에 고등학교 선생님이 계셔서 그분이 아이들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게끔 공부를 가르치는 것을 듣고 그런 방법을 아름이에게 넌지시 알려 주었다. 그리고 아름이가 혼자 스스로 문제를 풀어보다 잘 풀리지 않는 문제를 내게 물어볼 때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아름이에게 오늘 공부를 했는지, 언제 시험인지를 묻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아마 이렇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엄마는 없을 거란 그런 어쭙잖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춘기 자녀를 둔 엄마들끼리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남한과 쉽사리 대치상황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중2들 덕분이라며 엄마들끼리 농담을 한다. 중2병이라고 할 만큼 아이들이 예민해지는 시기라서 그런 말이 나온 듯싶다.


 아동심리상담사 자격증과 부모상담전문가 자격증을 공부하면서 사춘기 아이의 특징을 알고 있어서 되도록 잔소리를 안 하려고 노력했고 가끔씩 아이에게 농담을 건네서 분위기를 좋게 만드려고 애썼다. 그러나 사춘기 아이들이 늘 하는 툭툭 거리는 말투는 가끔씩 나의 다짐을 잊게 만들었다. 그날도 아이의 말투에 참다 참다 아이에게 폭풍 잔소리를 하다가 그만 마음과 다른 말이 먼저 툭 튀어나와버리고 말았다.




 아름이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비교적 빨리 스스로 진로를 선택한 아이였다. 어느 날, 아이와 나누던 대화와 상관없이 나는 아이를 비난하고 있었다.


“넌 좋겠다! 네가 좋아하는 거 하고 있어서. 엄마는 하고 싶은 거 있어도 참고 일 하고 있는데 도대체 너는 왜 그러니?”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인 줄 알면서도 나는 이럴 때 꼭 쓸모없는 부모의 권위만 앞세우고 있었다. 아름이는 내 말에 숨도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엄마! 내가 하고 싶은 거 한다고 해서 하나도 힘들지 않은 줄 아세요?”


 아름이의 말을 듣는 순간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아름이가 좋아하는 적성을 선택하였지만 그 와중에 힘든 일이 있어도 내게 내색하지 않았던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부끄러운 마음에 말을 얼버무리고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어서 책을 한 권 집어 들고 침대에 누웠다. 혜민스님이 쓴《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책을 읽다 한 구절이 눈에 띄었다. 


‘사람의 거리는 난로와 같아야 한다. 거리가 가까우면 뜨겁고 거리가 너무 멀면 차갑다.’     


 아.. 내가 아이와 거리가 너무 가깝구나. 하지 않아야 할 말을 부끄럽게도 아이 앞에서 아무렇게나 내뱉고 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이가 잘되라고 하는 잔소리인지 내 감정을 그냥 되는대로 표현하는지 구분을 잘하지 못했었다. 나는 아름이가 어렸을 때부터 중학생이 된 그때까지도 내 방에서 같이 잤다. 아름이와 같이 자면 몸이 훨씬 더 따뜻하고 마음이 안정되어 편하게 잘 수 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어느 날부터 아이를 감정적으로 혼내는 일이 더 많아졌다.


 사춘기 아이는 말을 툭툭 거리며 던질 때가 있다. 그리고 아름이가 사춘기 아이 특유의 말투로 말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고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대했다. 사실은 아이가 사춘기인 게 문제가 아니라 엄마인 내가 문제였다. 




 아름이 방은 베란다 없이 외벽이 바로 밖에 접해져 있어 그 방은 겨울이 되면 늘 추웠다. 춥다는 이유로 중학생 아이와 한 침대를 쓰고 있으니 하루가 멀다 하고 아이와 투닥투닥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혜민스님의 말씀처럼 아름이와 나와의 마음의 거리뿐 아니라 물리적인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아름이 방 벽지 위에 아이가 직접 고른 단열벽지를 사서 붙여주었다. 그리고 며칠을 고민해서 아름이가 마음에 들어하는 예쁜 화장대도 사주었다. 아름이가 자신의 방을 마음에 들게 꾸미면 혼자 잠을 자도 덜 무서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름이를 자기 방으로 보낸 후 나는 한동안 밤에 푹 잘 수 없었다. 아이가 옆에 없이 자는 것이 허전하기도 하고 무서웠다. 아름이 못지않게 겁이 많은 나였다. 




 나는 어렸을 때 밤에 혼자 잘 때 무서워서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깜깜한 방에 혼자 있는 게 무서워 불을 켜고 자기 일쑤였다. 그런 나를 위해 친정엄마는 콘센트에 꼽아서 켤 수 있는 작고 예쁜 인형 모양 등을 사주셨다. 그러나 불을 끄고 본 인형 등은 마치 귀신의 집에 나오는 인형 같았다. 웬만한 사람들은 다 보았다는 공포영화도 나는 일절 보지 않는다. 머리카락 끝이 쭈뼛거리며 서는 그 느낌이 싫었다. 밤이 되면 나는 자려고 누워 있다 무서운 생각이 들면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잠에 들었다.


 내가 어릴 때 방천장에 매달려 있던 전등은 요즘처럼 벽에 스위치가 있는 게 아니라 전등 자체에 줄이 달려있어 그 줄을 2번 잡아당기면 불이 꺼지고 켜졌다. 불을 끄지 않고 자는 나를 위해 아빠는 누워서 불을 끌 수 있게끔 천장에 달린 전등에 줄을 길게  방바닥 위 30cm 위까지 이어 주셨다. 잠이 올 때 이불을 걷고 누워서 전등에 길게 이어진 줄로 불을 끄고 바로 이불을 덮고 잠에 들 수 있게 해 주실 정도로 나는 겁이 많았다. 그런 나를 닮았는지 아름이도 겁이 많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나는 아름이랑 밤에 서로 의지해서 자는 게 좋았다. 


 아름이를 자기 방으로 보낸 후 어릴 때 생각을 곰곰이 하다 그동안 내가 잊고 지내던 것이 생각났다. 그 당시 깜깜한 밤이 무섭기는 했지만 어두운 방에 누워 혼자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은 그동안 까맣게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자면서 꿈을 꾸다 깨어나면 뒷이야기를 상상하면서 다시 잠을 청하곤 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밤에 라디오를 틀어놓고 들으며 애청자의 사연을 듣다가 웃기도 하고 슬픈 내용이 나올 땐 울기도 했었는데.. 


 아이를 위해 마련한 화장대와 밝은 색깔의 벽지로 한결 환해진 아이방에서 나는 아름이가 자기 전까지 옆에 앉거나 같이 누워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아름이는 가끔은 자다가 무서운 꿈을 꾸거나 밤에 방이 추울 때면 내 옆에 와서 같이 자기는 했지만 그 횟수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제는 같이 자자고 오라고 해도 오지를 않는다. 이렇게 서서히 엄마인 내 품을 떠나는 딸을 보니 엄마로서 아이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하는지 생각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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