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을 심어주는 엄마, 싹을 틔워주는 책
나는 집에 있을 때 TV를 거의 보지 않는 편이다. 남들이 너무너무 재미있다고 극찬하는 드라마는 눈여겨보았다가 한 번 보고 마음에 들면 아이가 자고 난 후 처음부터 끝까지 챙겨 보는 편이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면서 드라마보다는 아이와 함께 볼 수 있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훨씬 더 많이 보게 된다. 아이에게 책으로는 다 보여줄 수 없는 다양한 동식물을 보여 줄 수 있어 좋고, 아이도 처음 보는 동물을 보며 무척 흥미로워한다. 동물원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광활한 대자연의 품속에 사는 동물을 보면 어른이 된 나도 액션 영화를 보듯 손에 땀을 쥐고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느 날은 아이와 TV를 보려고 켰더니 TV 화면에 마침 세렝게티 초원에 무리 지어 사는 누 떼 중에 새끼를 밴 어미 누가 눈에 띈다. 이제 금방이라도 새끼를 낳을 듯 무리 속에 섞여 주변을 초조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누 떼가 보이는 초원에 앉아 멀리서 어미 누를 지켜보는 동물이 있다. 바로 초원의 왕 사자 가족이다. 드디어 새끼 누가 태어났다. 그리고 어미 뱃속에서 태어나자마자 생존을 위해 새끼 누는 바로 걷는다. 이렇듯 초식동물은 생존을 위해 태어나자마자 바로 걸어야 한다.
사람은 초식동물과는 다르게 성장한다. 태어나자마자 걷고 말하는 아기는 없다. 아기들은 태어나면 한동안 누워 지낸다. 아기마다 발달이 빠르고 느린 차이가 있을 뿐 아기들은 누워 있다 뒤집고, 기게 되며 그다음에 걷기 마련이다.
늑대 무리 속에서 자란 아이는 사람 말을 할 수 없다. 사람의 말을 배워야 하는 시기에 늑대와 함께 지냈기 때문에 늑대의 울부짖음과 행동을 따라 하게 된다. 즉, 발달에는 결정적인 시기가 있다. 이때에 부모가 아기의 발달을 알고 있으면 발달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그래서 영유아기 발달검사의 역할은 발달이 빠르냐 느리냐가 아니라 아이의 환경을 점검해 보는 것이다. 다음은 영아 시기별 발달 중 감각운동의 발달을 개월 별로 정리해 보았다.
· 6~8개월 : 손가락 몇 개로 콩만한 크기의 작은 물건을 집어 든다.
· 9~12개월 : 엄지와 다른 한 손가락 끝으로 물건을 집는다.
· 13~18개월 : 종이를 의도적으로 찢을 수 있다. 공을 던질 수 있다.
· 19~24개월 : 가위로 종이를 자를 수 있다. 선을 따라 가위질을 할 수 있다.
· 25~36개월 : 손가락 협응력이 발달하면서 블록 쌓기를 좋아한다.
아기의 현재 발달이 다음 발달을 도와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기가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움직여 작은 물건을 집을 수 있는 시기가 돌 무렵이다. 그때쯤 되면 엄마들은 아기에게 쌀로 만든 뻥튀기를 간식으로 많이 준다. 그렇다면 아기가 엄지손가락과 다른 손가락을 함께 움직이는 것이 또 뭐가 있을까?
바로 끄적이기와 가위질 등이다. 이제 소근육 발달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라 어른처럼 정교하게 그림을 그리거나 선명하게 색을 칠할 수는 없지만 크레파스를 손에 쥐고 팔을 휘적거리며 선을 그릴 수가 있다. 그리고 아기는 엄지손가락과 나머지 손가락을 가위에 넣고 가위를 벌렸다 오므렸다 할 수 있다.
돌 때 가위를 쥐어본 아기들은 두 돌이 지나면 종이에 그려져 있는 선을 따라 어느 정도 맞춰서 가위질을 할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티커 또한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스티커가 붙은 종이를 스티커 끝 부분을 잡고 떼어낼 수 있지만 아기들은 아직 소근육 발달이 정교하지 않아 스티커가 붙어 있는 종이를 구기다시피 해서 스티커를 잡아뗀다.
집에서 엄마랑 하는 한글 학습지가 밀려서 방 한구석에 쌓여있는데 어떻게 가르치고 활용해야 할지 모른다고 하는 6살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그 집에 가 보았더니 아이가 없는 집처럼 집안이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나는 집 정리를 너무 잘한다는 말을 건네면서 엄마가 그동안 아이에게 어떤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었는지 물어보았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아이에게 어렸을 때 스티커를 쥐어주었더니 온 사방에 붙여서 그때부터 스티커를 주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아이와 밀린 한글 학습지를 꺼내서 하다 그 아이가 스티커 떼는 것을 보니 영아기 아기들처럼 스티커가 붙어 있는 종이를 손으로 구겨서 스티커를 떼고 있었다. 그래서 그 엄마에게 아이에게 가위질과 색칠하기를 많이 해야겠다는 말을 했는데 아이가 싫어한다는 대답을 들었다.
5세가 되면 아이들은 자아가 발달하면서 “싫어.”라는 표현을 자주 한다. 그래서 아이가 익숙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한다. 즉, “엄마, 내가 가위질하는 게 힘들어서 하기 싫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아이는 그저 “안 해, 싫어.”라고 말하니 엄마가 볼 때 아이가 가위질하는 것을 싫어한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누리과정을 배우는 5세부터는 표현영역에서 그리기와 만들기를 많이 하게 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하원 하는 아이들 손에는 그날 수업시간에 무언가 만들었던 것을 집으로 가져온다. 그만큼 유치원 수업시간에 그리기, 색칠하기, 만들기를 많이 한다. 교육은 아이들 발달에 맞춰 이루어진다. 아이들마다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이 모두 다르다. 가위질을 잘하는 아이는 더 잘할 수 있도록 해주면 되는 것이고 아직 가위질이 능숙하지 않은 아이라면 가위질이 즐거울 수 있게끔 가위질을 잘할 수 있는 소근육 발달을 도와주면 된다.
유치원에서 아이들마다 특성에 맞추어 가위질 연습을 시켜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공교육과 가정교육이 함께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에서 가위질을 많이 해서 익숙한 아이는 유치원에서 만들기 시간이 즐거울 수밖에 없다. 가위질이 즐거운 아이는 가위로 할 수 있는 것을 더 많이 하려 하고 결국 자기 주도적인 아이가 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발달은 자존감과 연결된다. 그 시기가 된다고 발달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대학원을 다니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때 친정에서 아름이를 많이 봐주셨다. 아빠는 내가 어렸을 때 종이로 비행기랑 배 등을 많이 접어주셨는데 이제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날 아빠는 종이접기 책을 사 오셨다. 그리고 아빠는 아름이와 놀아주실 때 짬짬이 종이접기를 많이 해주셨다. 저녁에 아름이를 데리러 친정에 가면 늘 할아버지랑 종이접기 한 것이 거실 구석에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그중 몇 개를 가지고 집에 오곤 했었다.
아름이가 5살 무렵, 할아버지랑 자주 보던 종이접기 책을 펼쳐놓고 책에 나와 있는 강아지를 색종이로 접었다. 색종이를 3번만 접으면 완성할 수 있는 간단한 종이 접기였지만 5살 아이들이 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었나 보다. 동네 친한 언니가 있었는데 그 당시 육아휴직중이었다. 그 언니는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는데 아름이가 종이접기 하는 걸 보더니 나이에 비해 손끝이 야무지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나는 그때 아름이가 종이접기 하는 걸 잘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종이접기를 잘한다는 말을 옆에서 듣던 아름이는 더 많이 종이접기를 하게 되고 할아버지가 사준 종이접기 책에 나와 있는 웬만한 건 거의 접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아름이랑 서점에 함께 가서 한복, 사람 등 종이로 접는 다양한 방법이 들어간 책 몇 권을 골라 사 왔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새로 산 종이접기 책을 펼치고 혼자서 이것, 저것 접었다. 그림이 잘 이해가지 않는 건 내게 몇 번 물어보고 함께 접어 보았다.
이렇게 오랜 시간 종이접기를 했던 것이 빛을 발한 건 아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 갔을때였다. 아름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특기를 잘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해 으뜸왕상을 주었다. 아이들은 매 학년, 매 학기마다 다양한 으뜸왕상에 도전을 했다. 그중에 어느 해는 아름이가 종이접기 으뜸왕상에 도전했다. 아이들이 정해진 시간 내에 종류를 정하지 않고 무엇을 접든 10개를 접어내면 으뜸왕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날 저녁에 아름이는 집으로 퇴근한 내게 자랑을 했다. 시간 내에 종이접기를 해서 으뜸왕상을 받았는데 아름이가 종이접기 한 것을 보고 친구들이 와서 어떻게 접은 건지 방법을 물어보았다고 한다. 친구들은 시간 내에 정해진 10개를 종이접기를 했지만 자신이 접은 것은 개수로 친구들과 똑같이 10개를 접었지만 친구들보다 더 다양한 모양을 접었다는 것이다. 아름이가 평소에 심심할 때마다, 시간 날 때마다 집에 있는 종이접기 책을 펼쳐 두고 혼자 접어 본 것이 으뜸왕상에 도전할 때 도움이 된 것이다.
비단 소근육 발달뿐 아니라 부모가 아이들이 자랄 때 각 영역별 발달 특성을 이해하고 있다면 아이들이 발달해야 할 시기에 충분한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고, 아이들이 발달이 잘 이루어지도록 도와줄 수 있다.
아이들 발달에 필요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은 요리에 필요한 도구가 있어서 요리하기가 쉬워지고 즐거워지는 것과 같다. 나는 요리를 좋아하거나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음식 알레르기가 있는 아름이를 위해 집에서 음식을 자주 해서 먹었다. 계란을 좋아하는 아름이에게 계란으로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주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계란찜을 만들 때 계란 1개로 만들어도 충분했다. 그러나 아이가 점점 자라고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할 때는 계란찜을 만들려면 계란이 좀 더 많이 필요했다. 계란 1개를 노른자와 흰자를 풀어주려면 포크나 젓가락으로 해도 충분하지만 계란 5개를 포크나 젓가락으로 저으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팔도 아프다. 많은 양을 하려면 도구가 필요하다. 거품기를 이용해 계란을 풀어주면 훨씬 빠른 시간 내에 할 수 있다. 그래서 요리를 좋아하고 잘하는 집에 가보면 요리에 필요한 각종 조리도구들이 있기 마련이다. 요리할 때 도구가 필요하듯이 아이들이 발달할 때도 다양한 도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영아기 발달에 주목해야 될 이유는 영아기는 이해하지 않고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유아기로 넘어가면서 복잡한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뇌의 회로를 만드는 것이 쉬워진다. 어릴 때 다양한 언어 환경에 노출된다면 그 아이는 이중언어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사람은 눈에 익숙한 것만 보게 된다. 똑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사람마다 보고 기억하는 것이 다르다. 음악을 듣는다고 모두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없다. 사람은 감각의 발달이 이루어진 정도와 경험에 따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게 다르다. 그리고 그 발달이 가장 민감하게 이루어지는 시기가 바로 영유아기이다. 돌쟁이 아기에게 가위를 쥐어주어야 하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