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하는 딸과의 진짜 소통법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맞이했다. 초등학교 방학은 1~2주 정도 되는 유치원 방학과는 달리 한 달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학교를 가지 않는다. 아이를 데리고 놀러 가는 것도 잠깐일 뿐, 아이와 함께 해야 하는 기나긴 일상들이 기다리고 있다. 날씨가 좋으면 잠깐 밖이라도 나갈 테지만 춥다는 핑계로 바깥에 나가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집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총동원해 본다. 평일에는 아이가 멍하니 TV를 보게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방학이 길어질수록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보지 않으면 방학이란 시간은 제자리에 맴도는 느낌이다.
그날은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고 영어 DVD를 틀어 보았다. 우리나라 전래동화를 영어로 만든 DVD라 아이들 영어에 재미를 붙이기 좋다고 해서 아이와 함께 보게 되었다. 심청전을 영어로 만들어 놓은 10여 분 정도의 짧은 영상이었는데, 한글이 더 익숙해서였는지 아이는 DVD를 본 후 한글로 된 심청전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한글로 된 심청전 책을 사주겠다고 아이에게 말을 하고 컴퓨터 방을 나오며 거실 책장이 눈길이 갔다. 책장 맨 위 칸에 꽂힌 문학책 《심청전》이 눈에 띄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대상으로 나온 책이었고, 북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어른인 내가 먼저 읽어야지 하고 몇 달 전에 사두었던 책이었다. 우리 집에도 《심청전》 책 이 있다고 얘기했더니 아이는 그 책을 읽어달라고 하였다.
순간 ‘이 책은 네가 조금 더 커야지 읽을 수 있는 책이야.’라고 말을 하려다 자기 전에 읽어주는 책은 제법 글의 분량이 긴 책도 며칠가 연달아서 끝까지 읽어주었던 터라 그냥 읽어주기로 했다. 4일 정도를 매일 1시간 정도 읽어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며칠 동안 고민이 되었다. 아이가 이 글을 이해하며 듣고 있는지, 갑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읽어주어 그동안 공들여 쌓아 온 책에 대한 흥미를 무너뜨리지는 않을지 걱정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때 읽던 전래동화 심청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흐름이 빨라 기승전결에 푹 빠져 듣다 보면 30분 내에 이야기가 끝났다면, 문학책으로 넘어간 심청전은 각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도 자세히 되어 있고, 조선시대 문학답게 ‘곽 씨 부인은 음전하였다.’ 같은 표현이 들어있었다. 물론 초등학생이 보는 문학책이라 음전이라는 단어 뒤에 괄호를 치고 행동이나 용모가 우아하고 단정하다고 풀이가 되어 있기는 했다.
어른인 나도 평소에 쓰지도 않은 단어를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가 이해할까 라는 고민은 되었지만 내가 책을 읽어줄 때 아이가 가만히 잘 듣고 있기에 며칠 동안 책을 묵묵히 읽어 나갔다. 책을 읽어준 지 며칠이 지나, 책 뒤편에 조선시대에 쓰인 심청전의 이야기와 조선시대의 문학의 특징을 풀어놓은 글을 읽어주고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런데 그때 아이가 ‘엄마, 재미있다.’라고 말했다.
어리게만 봤던 아이가 긴 호흡의 책을 읽어주는 걸 듣고 재미있다고 말을 하는 걸 듣고 깜짝 놀라기도 하고, 내심 기쁘기도 했다. 그래서 그다음 날 직장에 나가 팔불출처럼 아이 자랑을 했다. 그 말을 듣고 직장상사 중 한 분이 사무실에 온 아이에게 책을 잘 읽는다면서 칭찬을 해주고 요즘 읽었던 문학책이랑 어릴 때 읽던 전래동화랑 무슨 차이가 있는것 같은지 물어보았다.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삶의 길이가 달라요.’라고 답했다. 그동안 읽어왔던 책과 글의 분량이 달라서 그런 대답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1년 정도를 문학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책장에서 문학책이 아이 손으로 들락날락하더니 3학년이 되었을 무렵에는 문학책을 혼자서도 곧 잘 읽었다.
그 후로 문학책만 읽는 건 아니었다. 아이 나이에 맞는 책도 잘 읽었지만, 때로는 아기들이 읽는 쉬운 책도 재미있게 읽었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서 일하는 엄마로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내가 일하는 시간 동안 아이를 학원에 보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고민 끝에 아이에게 하루에 한가롭고 심심한 시간을 선물하자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아이는 학교를 다녀와서 피아노 학원을 가거나, 아이가 건강히 자랐으면 하는 나의 바람에 운동을 하는 학원을 다녀와서는 아이만의 시간이 매일 주어졌다.
하루에 학원은 하나만 보내자는 내가 세운 원칙을 꾸준히 지켜나갔다. 그랬더니 학교 다녀와서 남는 시간에 친구와 놀기도 하고 놀 친구가 없을 때에는 무언가 손으로 꼬물락거리며 만들기를 하거나 책을 읽었다. 내 아이는 혼자 스스로 책을 읽는 독서 독립기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에 왔는데 내가 퇴근하고 집에 가면은 거실 한 구석이나 식탁 위, 침대 위에 아이가 읽은 책들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자기 전에는 늘 아이가 읽고 싶은 책과 내가 아이에게 권해 주는 책을 읽어주었다. 짧게는 15분에서 주말에는 좀 더 여유롭게 아이가 원하면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책을 읽어주었다.
회사에서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여행을 가는 며칠 동안 친정에 아이를 부탁하고 다녀왔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는 친정에서 《덕혜옹주》 책을 빌려왔다. 그 책은 외할머니가 읽는 책이었는데 할머니 집에 있는 동안 다 읽지 못해서 빌려왔다고 내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꽤나 두꺼운 책이어서 아이가 이해할까 싶었다. 그런데 아이가 책을 읽다가 내게 말을 건넸다.
그 내용인즉슨, 전에 나와 함께 읽었던 세계 신화의 이야기 중에서 일본의 신화 이야기가 그 책에도 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덕혜옹주가 정신병원에 갇혀있을 때 일본인 남편이 면회를 와서 일본 신화의 얘기를 꺼내며 처음 덕혜옹주를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을 말하는 장면이었다.
그 이후로도 《덕혜옹주》 책을 몇 번 더 읽고 외할머니께 그 책을 갖다 드렸다. 초등학교 3학년이 덕혜옹주를 얼마나 이해하며 읽었을지는 모르겠으나 중요한 건 아이가 책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은 며칠을 읽어야 할 분량이던, 1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아기가 보는 책이던지 가리지 않고 읽었다.
몇 년이 지나 아이가 중학생이 되었고, 방학을 맞이했다. 초등학생 때 읽던 《덕혜옹주》 책을 다시 읽고 싶다고 해서 이번에는 책을 사주었다. 방학 동안 몇 번이나 그 책을 읽더니 아이는 자기 방에 있는 책장에 꽂아 두었다. 내 아이를 잘 모르는 분들에게 아이가 책을 이렇게 읽는다고 말하면 ‘딸이라서 그렇다.’라고 말하는 분들을 본다. 때로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라는 말도 들어 보았다. 그러나 내 아이가 7살이었을 때 모습을 아는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이가 7살이었을 때, 봄이 되었는데도 아이는 한글을 읽을 줄 몰랐다. 그 무렵 나는 일을 시작해서 아이는 유치원에 다녀온 후 1 ~ 2시간 정도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일하러 간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아이가 나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직장상사님이 심심하게 있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려고 하면 처음에는 ‘재미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다른 놀이를 했었다.
그러나 몇 달이란 시간이 지나자, 아이가 책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7살 후반이 되었을 무렵에는 한글을 알게 되어 혼자서 아기들이 보는 책 정도는 혼자 스스로 읽는 아이로 변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하고 말을 할 정도로 아이는 변화했다.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혼자 스스로 책을 읽는 아이로 자랐다. 때로는 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는 이유를 10가지나 들어가며 나를 설득하기도 했다. 이렇게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더니 나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어느 날, 아이가 내게 토슈즈를 신고 싶다고 말했다. 운동하라고 다니던 무용학원에서 발레를 배우다 보니 토슈즈가 신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이는 취미로 발레를 배우러 다녔다. 그러나 토슈즈는 전공반이 되어야 신을 수 있었다. 그 말을 처음 들어을 때, 아이에게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고 며칠이 지나갔다. 그런데 아이가 또다시 말을 건넸다.
‘엄마, 제가 생각해 보았는데 그냥 토슈즈가 신고 싶은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잊을만하면 아이는 토슈즈를 신고 싶다고 계속 말을 했다. 그때마다 ‘엄마가 바빠서 생각을 못해 봤다.’ ‘아빠랑 상의해 봐야 한다.’ ‘아빠가 요새 야근이라 말을 해 볼 시간이 없었다.’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대답을 피했다. 그러다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아이는 내게 또 물어보았다.
‘엄마, 아빠랑 상의해 보셨어요?’
그 순간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들었다. 1년 반이란 시간이 지나도 아이는 잊지 않고 있다 계속해서 내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렇게까지 토슈즈를 신고 싶다고 하는데 부모로서 무조건 아니라고 말을 하는 건 아니란 생각이 들어 다음 날 저녁에 퇴근을 하면서 아이가 다니는 무용학원 원장 선생님과 상의를 해보았다. 그리고 아이가 저렇게까지 토슈즈를 신고 싶다고 하는데 앞으로 무용이 아이의 앞날이 되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거니까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던 지금의 노력이 아이에게 힘이 되어 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남편에게도 아이가 오랜 시간 나를 설득해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남편은 아이가 하자는 걸 시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솔직히 계속해서 무용을 시킬 수 있는 자신이 없다는 현실적인 대답을 했다. 그래서 아이의 교육비는 내가 책임지겠으니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자고 뜻을 모았다.
그리고 아이를 불러서 네가 하고 싶다고 해서 토슈즈를 신을 수 있도록 전공반으로 옮겨줄 테니 열심히 하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물어보았다. 어떻게 1년 반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잊지 않고 엄마를 설득할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무척 궁금했다. 그랬더니 아이는 책장에서 《안나 파블로바》 책을 꺼내 왔다.
‘엄마, 안나 파블로바는 10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엄마랑 발레 공연을 보러 갔대요. 그리고 그때서야 발레를 시작했어요. 저는 안나보다 더 어려서부터 발레를 했잖아요. 그러니 저는 이제 토슈즈를 신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해요.’
내가 아이에게 읽어주었던 책 중에 《안나 파블로바》 책이 있다는 걸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겨우 1~2번 읽어주었을 뿐인데 아이는 가끔 혼자 그 책을 꺼내 읽고 있는 걸 보고도 대수롭게 생각지도 않았다. 그저 아이가 발레를 배우고 있어서이거나, 튀튀(tutu) 등의 발레복이 예뻐서 그 책을 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는 혼자 책을 읽으며 자신의 꿈을 잊지 않고 키워 가고 있었다.
책은 아이에게 생각하는 힘을 키워준다. 책은 인생의 계기를 만들어준다. 책은 읽는 사람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리고 책은 오랜 시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는 않다. 내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길 바란다면 매일 조금씩 책을 읽어 주면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도 없다. 책에 쓰인 내용을 모두 읽을 필요도 없다. 또한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가 읽는 책의 수준을 미리 짐작할 필요도 없다. 아이가 관심 있어하고 읽고 싶어 한다면 그저 그 책을 읽어주면 된다. 책에 쓰인 한 문장을 읽다가 아이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 더욱 좋다. 그렇게 부모가 읽어준 책을 보며 아이는 책 속에 있는 글을 마음속에 새기고 스스로 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