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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딩코치 Young Oct 24. 2021

나에게는 책 읽어주는 아빠가 있었다

성장하는 딸과의 진짜 소통법

  아마도 내가 학교 가기 전이었던 것 같다. 저녁을 먹고 나서 자려고 내 방에 누워 있으면 내 옆에서 책을 읽어주던 아빠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때 그 기억이 좋아서였는지 아직도 가끔 내게 책을 읽어주던 아빠가 생각이 난다. 아빠를 떠올리면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 아빠가 생각난다.


  아빠의 목소리는 나의 자존감을 높여주었다. 언제나 내 편인 든든한 아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빠를 생각하면 힘이 난다. 나이가 서른이 넘어 아빠가 나지막이 말씀해 주셨던 말들이 신기할 정도로 가끔씩 생각이 날 때가 있다. 내가 어른이 되어 내 아이의 부모로서 인생을 살면서 그 말씀들이 굉장히 도움이 된다. 가끔은 아빠의 말씀을 기록해 놓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 때도 있다.  아빠의 말씀들은 내게 살아가는 힘을 준다.




  2013년, 회사에서 순수 국내 창작 그림책이 나온 것을 기념하여 북 콘서트를 열었다. 그때 ‘섬진강’ 시로 유명한 김용택 시인이 쓴 글이 책으로 수록되어 김용택 시인을 직접 뵙고 강의를 듣는 기회가 있었다. 인생을 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말문을 열며, 강의를 들으러 온 부모들을 위해 마지막에는 김용택 시인이 부모로서 자식들을 키우며 있었던 일과 아빠로서 자식들에게 한 행동을 말씀해 주셨다.


달강아지 우리 창작 그림책 《우리 동네 할머니들》by 웅진북클럽


  김용택 시인의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다니다 학교를 그만 다니고 싶다 했던 선택을 인정해 주고 지지해주었다는 얘기를 들으며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어느 날, 일본으로 떠나가 공부를 하던 딸에게 전화가 왔다고 한다. 딸은 전화를 통해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폭풍같이 눈물을 흘리며 오열을 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딸은 우연히 컴퓨터를 켜고 이메일을 확인했는데 자신의 이메일로 9년 동안 묵묵히 보내온 아빠의 몇 백통이 넘는 이메일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아빠가 그동안 아무 말도 없이 자신에게 이메일을 긴 세월 동안 꾸준히 보낸 메일함을 확인하며 부모의 사랑을 흠뻑 느꼈다고 한다.


  김용택 시인은 자식에 대한 사랑은 바로 이래야 한다고 했다. 딸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건 아빠의 마음이지만, 그 메일을 보는 것 또한 아이의 선택이라고. 내가 사랑을 주었다고 해서 꼭 자식이 그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 순간, 나는 아빠가 생각이 났다. 아빠는 좋은 글을 보거나 책을 읽으셨을 때, 친구에게 받은 이메일 내용 중에 마음에 새길 수 있는 내용을 보시면 자식들에게 보내 주셨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정신없이 살다 보니 아빠가 보내신 이메일을 읽어 보기도 했지만 때로는 정성스러운 아빠의 이메일에 매번 답을 보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내게 꾸준히 이메일을 보내주셨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이제는 아이도 제법 자라 나만을 위한 시간이 조금 생기기 시작했다. 책육아 모임을 시작하면서 쌓인 교안과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SNS에 기록하려고 노트북을 장만하였다. 그렇게 노트북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어느 날 메일함에 잔뜩 쌓인 고지서와 스팸메일 정리를 한 적이 있다. 그동안 아빠가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답은 못했지만 다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오산이었다.



  메일함을 정리하다 그동안 아빠가 보내주신 메일 중에 읽지 못했던 메일을 발견하였다. 김용택 시인의 강의 때 들었던 그 분의 딸 얘기처럼 나는 아빠의 사랑에 눈물을 흘렸다. 평소에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씀도 제대로 못하고, 감사하다는 말도 표현못했는데 아빠는 늘 꾸준히 막내딸인 내 생각을 해 오셨던 것이다. 


  아이가 엄마의 손길이 필요로 하지 않는 중학생이 되자 전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 아주 가끔이지만 부모님과 가까운 곳으로 함께 드라이브를 가기도 하면서 부모님과 대화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이가 팔순이 다 되어가는 아빠에게 요즘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말씀드렸더니 몇 주후에 다시 만났을 때 내가 읽고 있던 그 책을 사서 읽으셨다고 한다. 아빠는 다 아시고 경험한 내용이었을 텐데 그 책을 사서 읽으셨냐고 했더니 젊은 사람들이 쓴 글에서 아빠도 배우는 게 많다고 말씀해주셨다. 아빠는 외국에서는 가족들이 함께 같은 책을 보고 대화도 나눈다고 하는데 그동안 그러지 못했다고 말씀하시면서 만날 때마다 아빠가 요즘 읽고 있는 책에 대해서 얘기를 해주기도 하셨다. 


  어느 날, 아빠가 내게 해주신 말씀 중에 제일 많이 해주셨던 말을 떠올려 보았다. 아빠는 특히 자식들을 격려하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나는 8살이 되기 전에 한글을 읽을 줄 알고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나는 1980년대에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유치원에 다니는 일도 흔치 않았고 모두들 학교에 가서 한글을 처음으로 배웠다.




  내가 한글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아빠 말씀으로는 오빠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면서 자연스레 막내인 나도 함께 오빠 틈에 끼어 한글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아빠가 내게 한글을 가르쳐 주다 오빠들보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내가 한글을 잘 배우지 못하자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아빠가 귀찮을 정도로 몇십 번이고 이 글자는 뭐냐고 다시 물어보더니 어느새 내가 한글을 읽을 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 오빠와 함께 서점이 들려 그 당시 시리즈로 유행했던 책을 사러 갔고 그 책을 사 와서 집에서 혼자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내가 한글을 스스로 공부해서 익혔던 일을 잊어버릴만하면 얘기해주시면서 늘 칭찬을 해주셨다. 


‘너는 참 대단한 아이야. 혼자서 그렇게 아빠한테 여러 번 와서 물어보고 스스로 한글을 터득한 거야.’


  아빠의 격려가 담긴 그 말을 나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고등학생 때도, 심지어 대학을 졸업해 어른이 되었을 때도 말씀해주셨다. 아빠가 그 말씀을 해주실 때마다 어느 때는 그냥 흘려듣기만 하기도 하고, 또 그게 정말 대단한 건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요즘 5살, 6살 되는어린이들을 보면 부모님이 어렸을 때부터 책을 꾸준히 읽어준 아이들은 일부러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한글을 읽는다. 아빠는 내가 한글을 혼자 스스로 익혔다는 칭찬도 해주고 싶으셨겠지만 나의 자존감 또한 계속해서 격려해주고 싶으셨던 마음이셨을 것이다. 


  이제는 마흔이 넘어 고등학교 다니는 딸을 둔 엄마가 된 지금도 나는 아빠를 뵈러 가면 가끔 ‘아빠, 제가 뭐를 어떻게 했는데요.’하며 요즘 살고 있는 근황을 말씀드리면 아빠는 늘 이렇게 대답해주신다. 


‘잘했어, 내 딸. 아주 썩 잘했어.’


  작년에 명절을 맞아 공휴일이 여러 날 되어, 부모님과 함께 영화관에 간 적이 있다. 영화를 보러 들어가기 전에 시간이 남아 있어 영화를 보면서 마실 음료수와 팝콘을 사서 카페에 앉아 있는데 아빠가 문득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할아버지가 계셨다면 아빠 역할이 뭔지 보고 자라서 좀 더 너희들에게 잘해줬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할 때가 있다.’


  사진 속에서만 뵈었던 할아버지는 아빠가 10살이었을 때 납북되신 걸로 짐작만 한다. 전쟁 중에 별별 사연들로 가족이 헤어져 못 만난 가족들이 많았던 그 시절을 지나온 아빠는 자식들에게 속내를 비추지 않으셨지만 아빠 역할에 대해 늘 고민을 하셨던 모양이다. 그러나 북큐레이터로 일하면서 만난 요즘 자상한 젊은 아빠들과 비교해도 우리 아빠는 단연 최고다.


  결혼하고 임신했을 때 태교로 동화책을 사서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읽어 준 것은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전적으로 내게 책을 읽어주신 아빠 덕분이다. 행복한 기억은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서 행동하기 마련이다. 자연스레 태교동화부터 시작해 이제 막 태어나 누워 있는 아기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그때는 그 효과를 잘 모르고 누워 있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아이가 백일이 지날 무렵, 나는 대학원에 다시 복학했다.


  아침에 나가 밤에 들어와도 나는 시간 나는 대로 아이에게 책을 읽어 주었다. 그리고 혼자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보다 함께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에서 뜻이 맞는 엄마들끼리 매주 한 번씩 만나 아이들을 위해 책을 읽어주고 함께 놀아주는 모임을 만들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때도 아이에게 매일 책을 읽어 주었다. 아이가 자기 전에 책 3권을 읽어주었을 뿐이지만 아이는 책을 읽어주면 좋아했다. 



  아이가 태어나서 누워 있을 때부터 책을 읽어준 아이와 걷고 나서 책을 읽어 준 아이는 책과 익숙해지는 시간의 차이가 생긴다는 걸 북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알게 됐다. 간혹 아이가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부모님들의 말을 들어보고 교육환경을 조사해 보면 아이에게 처음 책을 읽어 주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아이가 한글을 읽을 수 있으면 대부분의 부모님이 아이에게 더 이상 책을 읽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가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음을 읽게 되었다는 의미이지 뜻을 알고 이해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모든 아이는 책을 좋아한다. 다만 아이마다 좋아하는 책이 다를 뿐이다. 오늘 점심으로 먹을 메뉴를 고를 때 늘 밥을 선택하는 사람은 국수보다 밥을 좋아하는 것이다. 아이가 책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다. 다만 아이는 균형적으로 자라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부모는 아이에게 골고루 책을 읽어주어야 한다.



  얼마 전에 아빠가 읽어보신 책 중에 괜찮은 내용이 들어 있다며 내게 책 선물을 해주셨다. 팔순을 코앞에 두신 아빠가 권해주신 책을 읽어보며 어떤 대목에서는 아빠가 내게 이런 말씀을 해주고 싶으셨구나 느껴질 때 참으로 감사하다. 좋은 습관은 세대를 넘어 이어진다. 내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습관은 아이와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아빠가 내게 그래 오셨던 것처럼 오늘도 나는 내 아이와 책으로 소통한다.     



“엄마는 요새 이 책을 읽고 있는데.. 넌 무슨 책 읽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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