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현의 혜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혜 Sep 12. 2024

팔월 下

240805-0809

여보세요.


잠에 젖은 목소리에 짜증이 밴다.


안녕하세요, 홍 국장님. 배 약사입니다. 어제가 월급날인 줄 아는데, 급여가 들어오지 않아서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구구절절한 사정이 줄짓는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어요. 질펀한 술자리에 정신을 놓았네요. 직원 월급 전부 밀렸군요. 당장 보내 드려요. 치킨 맛있게 드세요. 정산 오류로 만 원 깎인 급여와 함께 기프티콘을 받는다. 민망하게 정정한다. 출근을 강행한다. 홍 국장은 동그란 의자에 걸터앉아 실패한 소개팅을 들먹인다. 엉덩이 가볍고 눈치 빠른 남자가 좋아요. 파리 날리는 하오. 제인은 사람 그림자만 보여도 벌떡 일어난다. 괜히 일반약 껍데기를 만지작거린다. 약장을 정리한다. 언제 깔깔 웃었나. 조제 모니터로 달력을 확인한다. 안면 근육 자의로 움직인 지 오래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린다. 낯짝보다 활짝 열린 유리문으로 휭휭, 에어컨 바람은 속절없이 빠져나간다. 한낮 열기가 스멀스멀 기어든다. 손님은 코빼기도 안 비친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만 이따금씩, 무르익은 아스팔트를 긁는다. 멋쩍게 퇴근한다. 한 시간 뒤. 제인은 문자를 받는다.


약사님. 고민 끝에 연락드려요. 약국 매출이 감소해 지출을 줄여야 하네요. 경영이 처음이라 쉽지 않아요. 문자로 전할 이야기는 아닌데. 전화 대신 텍스트로 남겨요. 함께하지 못해 죄송해요. 어안이 벙벙하다.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었나. 제인은 계약서를 뒤적인다. 일방 계약 해지 위약금 항목이 떡하니 명시되었다. 계산한다. 청구한다. 뒤척이며 밤을 지새운다. 흐릿한 아침. 전화를 받는다. 장 사장이다. 느닷없이 일갈한다. 배 약사. 뭘 하나. 일 안 하나. 놀 시간 있나. 돈을 벌고 싶으면 일을 해야지. 홍 국장에게 위약금을 요청하면 어쩌나. 전문직 사회에서 상도덕이 아니다. 약사 면허로 얼마든지 일을 구할 수 있잖나. 프리랜서는 자유롭게 일을 시작하고 그만둘 수 있는 직위 아닌가. 배 약사 같은 행동은 옳지 않다. 약사 사회에 소문나기 십상이다. 자네 이미지를 망치는 짓이다. 취업이 어려워질 게다. 새겨 들어라.


근육이 덜덜 떨린다. 얼음 바구니를 끼얹은 듯하다. 바다가 스치듯 발화한 문장이 떠오른다. 요즘은 정말이지, 존경이 상실된 시대야. 존경 상실. 제인은 학창을 회상한다. 고등학교 지구과학 선생님을 존경했다. 요연한 필기와 명료한 발화가 탐탁했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았다. 곧은 자세를 귀감 삼았다. 생명과학 선생님을 존경했다. 인터넷 강의로 마주했다. 화면 너머 부드럽고 단단하게 수험생을 격려했다. 손편지와 양말을 선물 받았다. 세상을 얻은 듯했다. 든든했다. 수능 날 선물 받은 양말을 신었다. 학업에 박차를 가했다. 약학대학 수학했다. 약물치료학 교수님을 존경했다. 지혜롭고 박식했다. 명강의를 펼쳤다. 교재를 덮고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토씨 하나까지 완벽한 수업이었다. 끊임없이 본업에 정진했다. 본받고 싶었다. 제인은 약사가 된다. 약업에 뛰어든다. 존경은 요원하다.


차가워진 손끝으로 굵직한 땀방울을 닦는다. 여린 나뭇가지 사이 비스듬히 비치는 햇살이 그립다. 노동은 생존에 필수다. 선택할 여지가 없다. 밸런스 게임인지, 제로섬 게임인지, 루징 게임인지. 여하튼 눈물 나게 지루한데 로그아웃은 더럽고 복잡하다. 답 없는 질문으로 하루를 채운다. 어깨가 우쭐해지는 일을 찾고 싶다. 원하는데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바다는 수화기 너머 제인을 다독인다. 언젠가 어떻게든 될 거야. 지친 나날을 견디다 보면, 어느 날 이루어지기도 하잖아.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240130
1. 뜨거운 수제비 국물과 시원 매콤한 깍두기가 이리 잘 어울릴 줄이야
2. 침이 고인다.. 조경란 소설 제목 말고 진짜 침!
240131
1. 바리스타 2 급 시험
2. 하트 제대로 완성
3. 나는 스타 바리스타
4. 새해 첫 민간자격시험 도전기, 성공함
240201
1. 어깨가 우쭐해지는 일을 찾는 중
2. 계단 청소를 마치니 얼굴에 땀이 흐른다
3. 마스크 속이 축축하다
240202
1. 저가 항공이라도 이용해서 멀리 가고 싶은 날
2. 만약 간다면 파리에 가야지
3. 그리고 또 시간이 되면 프랑스 남부 예술가들의 마을 생 폴 Saint Paul에 가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