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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현의 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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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혜 Sep 14. 2024

제인에게

240810-0813

안녕. 무탈하니. 오랜만에 펜을 쥔다. 어색하네. 얼굴 마주하고 수저 들어도 손 편지는 생일에만 쓰니까. 일 년에 한 번 꼴로 필체를 주고받잖아. 우선 사과부터 전할게. 네가 좋아하는 두괄식이야. 포부에 찬물을 끼얹었어. 있는 걸로 써랬지. 우리는 천년만년 살아낼 수 없다. 수명은 500 년이 아니고. 마음이 시키는 카메라를 사야지. 일감이 줄어 돈이 궁한데 무리하는 것 같아서 던진 말이야. 장 국장 같았어. 미안하다. 담아두지 말길 바라. 나는 네 덕분에 마음 편히 베이스를 지른다. 끼리끼리 아니겠니.


여름 방학이야. 부럽지. 가평 다녀왔어. 동학년 선생님들과 함께였고. 숙소는 저렴했어. 시설은 처참했지. 신입생 환영회 이후 이런 수준 잠자리는 처음이었어. 바람 지나고 물 흐르는 자연의 소리 기대 않았거든. 실내에서 풀벌레가 노래할 줄 몰랐네. 귀뚜라미 터전에 인간이 침입한 격이었어. 하나하나 휴지에 싸서 바깥으로 보냈지. 벌레 공포증이 없어 망정이야. 울어봤자 어쩌겠어. 학부모 전화벨 우는 날이 더 무서워. 대강 짐을 풀고 빠지 타러 나갔어. 강은 구정물이었어. 닿았다간 피부가 문드러질 것 같았다. 기구를 탔어. 빠뜨리지 않게 운전하더라. 회전율을 고려한 게지. 태양이 저물자 따끔따끔한 바닥은 식어가고 풀장에 비눗방울이 차올랐어. 조명은 불그레한 보랏빛이었고. 진부하지. 네가 놀렸잖아. 이 쾌락주의자. 네 말마따나 나는 디오니소스니까, 그날 밤도 흔들어 재꼈어. 춤을 추면 아무 생각 안 들어서 좋아. 누군가 얼굴에 자꾸만 물총을 쏘았어. 눈앞이 번쩍거렸어. 귓전은 왕왕거렸어. 디제잉은 참신한 편이 못 되었고. 선곡 왜 이러니. 열두 시가 지나자 홍등은 꺼졌어. 민낯 드러난 하루살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자취를 감추더라. 거품은 사그라들었어. 산처럼 쌓였던 무더기가, 여럿 묻을 법한 방울 무덤이 꿈같아. 흰 수영복은 찜찜한 핑크색으로 변했어. 비누 냄새가 퀴퀴하게 남는다.


돌아가는 기차 시간이 애매했어. 근처에서 영화를 보자. 의견이 모였지. 한 선생님은 최근 개봉한 <파일럿>이 궁금하대. 별생각 없었고 마침 시간이 맞았어. 팝콘에 더 눈길 가더라. 고소한 맛과 달콤한 맛을 반반 섞었다. 영화는 튀긴 옥수수보다 인상 깊지 않았어.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지. 네가 결코 보지 않을 종류야, 한국 상업 영화. 이렇게 말하면 싫어하려나? 맞잖아. 너는 매번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구구절절한 제목만 고르니까. 감독 이름도 어려워. 아피찻퐁이니, 뭐니. 여하튼. 이 영화를 자진해서 보는 네가 상상 안 가지만, 보았을 때 반응은 그리기 쉬웠어. 안경 고쳐 쓰고 팔짱 낀 다음 한숨 푹 쉬고서는, 한숨조차 안 나온다, 말할 테지. 나름 웃으며 시간을 죽였다. 여성 감독이라 충격받았을 뿐이야. 당연히 남자 감독일 줄 알았는데. 곱씹을 여운은 아무래도 안 남더라. 탈수에 바닷물 마셔 외려 갈증 난 사람처럼, 섬세하고 단단한 작품을 보고 싶어졌어.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예매했으니, 괜찮은 작품 찾으면 후기 전할게. 네가 먼저 감상하려나?


마지막 통화가 떠오른다. 너는 부르짖었지. 근로기준법이나 고용노동부 말고, 알콩달콩한 연애 고민이나 하고 싶다고. 호감 가는 남자애 연락이 늦어, 내게 관심이 식은 걸까, 따위가 인생 최대 심려이면 좋겠다고. 홍 약국에 이어 장 약국도 해고당했다고. 전문직 집단도 별 것 없구나. 위법을 밥 먹듯 하고 본인끼리 카르텔 형성하니. 오히려 잘 된 일이야. 이번 기회에 종로 5 가는 완전히 끊어내. 입사 초반부터 이야기했잖아. 이상한 곳이라고. 오래 못 다닐 것 같다고. 계약 기간을 한 달로 잡아 매달 갱신하는 와중에 수습 급여도 일 개월이라, 싸게 쓰고 잘라 버려 약사 갈아 쓴다고. 마음 상할 필요 없어. 처음부터 없던 인연이라 생각하면 어때. 무더위에 진 빼면 힘들어. 점심시간이 짧아 매번 급하게 식사했다며. 소탈한 음식을 천천히 삼키길 바라. 쉬엄쉬엄 살아 내자. 아프지 말고.


바다가.


24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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