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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혜 Feb 17. 2022

습한 수채

단편소설 9 화

 오 국장은 오 세 같은 오십 세였다. 수치를 모르는 사내였다. 거리낄 게 없었다. 직원이나 약사를 향해 육두문자를 날렸다. 손목에 금줄을 둘렀다. 손가락 두 마디 두께였다. 주먹만 한 시계 판이었다. 돈 썩는 냄새가 났다. 광택이 섬찟했다. 옹졸한 눈구멍에서 새는 빛과 흡사했다. 온화는 거북이가 되었다. 머리를 등껍질 사이에 숨겼다. 움츠렸다. 몰래 한숨지었다. 저런 사람도 약사라니. 오 국장과 조 교수님이 동기라니.

 조 교수님은 약물치료학을 가르치셨다. 직능을 교단에서 마음껏 펼쳤다. 전문인다웠다. 선망의 대상이었다. 약학대학에서 날개 펼친 이상은 약국에서 추락했다. 온화는 일 년 뒤를 상정했다. 약사고시를 치르고 난 후다. 오 국장 같은 약사와 일할지도 모른다. 혀끝에 단정한 절망이 쌉쌀했다.


 오 국장은 조제실을 들락거렸다. 필요 없는 한소리를 툭툭 뱉었다. 온화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 국장님, 저에게 샐러드 남은 것 주지 마세요. 안 드실 거면 버리셔야지, 자꾸 주시면 곤란합니다.

 ― 에이, 내가, 뭐. 학생을 음식물 쓰레기통 취급이라도 했다는 거야? 아까워서 준 거지. 이거 비싼 샐러드라고. 육천 원 짜리야.

 오 국장은 무안했다. 옆을 얼쩡거렸다. 온화 어깨에 두 손을 올렸다. 주물렀다. 진갈색으로 굽어진 손가락이었다. 브래지어 끈 바깥에서 가운 깃 안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일이 분 남짓한 시간이었다. 온화는 얼어붙었다. 손바닥에 초승 자국이 넷 찍혔다.

 의외의 순간은 의외로 불쾌하지 않았다. 친근한 표시였나 봐. 별일 아니야. 오 국장이 오 국장다운 짓을 한 거지. 과민 반응 말자. 되뇌었다. 곱씹을수록 비린 맛이 퍼졌다. 침조차 삼키기 어려웠다. 케케묵은 기억을 토했다.


 열아홉이었다. 하복 차림이었다. 여자 고등학교였다. 기숙사였다. 세면실이었다. 세면대 넷 중 맨 왼쪽에 섰다. 왼팔을 뻗으면 샤워실 문에 닿을 거리였다. 양치했다. 왼쪽 아래 어금니를 닦았다. 거울 뒤쪽에 그림자가 졌다.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기름칠한 머리카락을 넘겼다. 빈 정수리를 채웠다. 보랏빛 입술이 얄팍했다. 오십 대 국어 선생이었다. 김 사감이었다.

 소스라쳤다. 물었던 칫솔이 소리를 막았다. 김 사감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주물렀다. 바깥에서 안으로. 삼각근부터 상부 승모근까지. 귓가에 입김이 스쳤다.

 ― 소등 시간 지났는데 여기에서 뭐 하는 거야?

 움직일 수 없었다. 등과 배 사이 거리가 좁아졌다. 교복 치마에 아랫도리가 닿았다. 회색 천 한 겹은 얇았다. 둔부에 촉감을 여과 없이 전했다. 오만상을 찌푸렸다. 몸을 뒤틀었다. 치약 거품을 뱉었다. 퉤. 김 사감은 주의하라는 말을 남겼다. 사라졌다. 생경한 여름밤이었다. 생생한 찰나였다. 목덜미에 들러붙은 습기. 오이 색 비누에 에스 자를 그린 검은 머리카락. 낡은 청색 타일 패턴. 눈 감고도 그렸다. 축축한 수채화였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도시로, 도시로, 도망할 뿐이었다. 도가니는 먼 곳에 있지 않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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