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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가비 Oct 20. 2024

[100-42] 너와 나의 리틀 포레스트

 열 여섯 살인 딸아이는 요즘 아이들 같지 않게 전원 생활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부터 오가면서 자연친화적인 정서가 생긴건지, 동물을 너무 좋아하는 성향이라 그런건지 그 모두인지 알 수 없지만 시골에 오면 편안함을 느끼는 게 눈에 보인다.


 시골집에 올 때마다 건너편 집 소도 보러 다니고 옆집 강아지도 보고 동네에 돌아다니는 길고양이들도 반가워하며 마을 산책을 다녔던 기억, 옥상에 올라가 돗자리펴고 누워 한없이 바라보던 별들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한다.


 오늘도 마당에서 저녁을 먹고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옥상에 올라가서 별을 보자고 했다. 몇 해 전 어느 여름 밤, 외할머니와 함께 옥상에 누웠을 때 적당한 지열이 남아있는 바닥의 온기와 밤이 되면서 불어온 제법 선선한 바람, 그리고 쏟아질듯 가득한 별들을 보며 도란도란 이야기나누던 그 날이 자주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 밤에 별똥별을 보았다고도 했다.


 남편과 셋이 누워 점점 더 많아지는 별을 감탄하면서 보다가 한쪽에서 신기한 현상을 보고 딸이 소리쳤다. 얼른 보니 별들이 기차처럼 줄을 지어옆으로 움직이다가 하나씩 점점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대체 뭘까. 별똥별처럼 휙 지나가는게 아니라서 너무 놀랍고 신기했다. 딸아이가 별보기 하자고 제안한 덕분에 우리는 시월의 이 밤을 잊지 못할 것이다. 딸아이의 기억에는 외할머니와 별을 보던 밤과 엄마아빠와 함께 별을 보던 밤이 추가되었으리라.

  

 당분간 시골집에서 딸아이와 둘이 지내기로 했다. 자연스럽게 영화 리틀 포레스트가 생각난다. 도시 생활에 지치고 힘들어진 주인공이 엄마와 살며 추억을 쌓았던 시골집에 내려와 생활하면서 몸과 마음의 여유를 찾고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이 담긴 내용이다. 보는 이들 모두에게 힐링을 선사하는 영화로 유명하다. 나역시 좋아하는데 여러 번 봐도 질리지 않고 딸을 키우는 엄마로서 내용이 특히 더 마음에 남는 영화다. 나도 내 딸에게 살아가는데 힘이 될만한 좋은 기억을 만들어 주고 싶고 단단한 내면의 힘을 키워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이제는 혼자서 살아가야 하지만 씩씩하다. 엄마와 같이 먹었던 음식, 나누었던 대화가 내면에 잘 자리잡고 있어서 힘든 순간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골집에서 지내면서 엄마가 만들어주었던 음식, 해주었던 조언 등을 떠올리며 이제는 자신이 직접 농작물을 기르고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당당하고 용기 있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엄마가 자신을 키운 방식을 조금씩 이해하는 듯한 모습이 보여진다. 그녀가 하나하나 옛 추억을 곱씹고 엄마를 떠올리는 장면은 뭉클하다.


  영화속 엄마의 대사 중 나도 딸아이에게 그대로 해주고 싶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기다려, 기다릴 줄 알아야 최고로 맛있는 음식을 맛볼 수 있어.”

빠른 속도와 즉각적인 해결에 길들여진 현대인은 인내와 기다림이 부족하다. 진짜 좋은 것은 기다리고 때가 되어야 한다는 것, 진짜 맛있는 것은(음식의 맛만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느림의 미학을 통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드러나는 대사다.


 또 다른 하나는 “혜원이가 힘들 때마다 이 곳의 흙 냄새와 바람과 햇볕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다시 털고 일어날 수 있을 거라는 걸 엄마는 믿어.”

삭막하고 상처받는 일, 지치는 도시 생활 속에서 임용고시에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는 삶을 살며 고단해진 혜원은 시골집에 내려온다. 배가 고파서. 그 배고픔은 진짜 밥다운 밥을 먹지 못한데서 오는 허기이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던 시골이었지만 엄마가 만들어준 자연친화적인 추억을 자양분 삼아 이곳에서 스스로 개척하고 일구며 살아나갈 마음을 먹는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자 쉽지 않은 선택이다.


 딸아이도 친구 관계에서 상처 받고 학교와 학원을 오가는 답답한 생활에서 몸과 마음이 지칠 때 시골집이 생각이 나는 것 같다. 이곳의 풍경, 바람과 햇살, 평온하게  보낸 시간들이 아이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일까. 여기서 지내는 동안 같이 식재료를 수확하고, 요리해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오감에 새겨지는 추억을 많이 만들어주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황금빛 논과 가을 하늘,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연신 "너무 좋다."를 외치는 아이를 보니 내 마음도 좀 편안해졌다. 내려오길 잘했구나. 일단 지금은 우리의 이 순간을 충분히 맛보자. 감을 따서 달콤한 홍시를 먹고, 모닥불에 밤을 구워먹으며 "맛있다."고 하는 모습에 엄마아빠는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 내일은 애호박전을 해줄게. 고구마도 쪄먹자.


 우리의 힐링 공간이자 리틀 포레스트인 이곳에서 소박하지만 풍요로운 삶, 느긋한 시간과 자연의 축복을 충분히 누리려고 한다. 영화속 주인공처럼 나도 너를 이곳에 심고 싶다. 지금의 이 시간과 추억들이 너의 몸과 마음에 촘촘히 새겨지기를. 그리하여 살면서 지치고 힘든 때 너의 마음을 녹여줄 따듯한 위로와 힘이 되는 추억들이 너를 붙들어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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