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에게 돌을 던질 자, 누구인가?

소외된 타자와 평화 공동체의 장벽

by hym

마라렛 와일드의 그림책 <여우>...


신체장애를 지닌 두 존재, 눈이 보이지 않는 개와 날개를 펼 수 없는 까치는 서로의 눈과 날개가 되어 상부상조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등장한 붉은 털의 여우는 개와 까치 사이의 견고한 사이에 끼어들 틈이 없어 외로움에 마음이 타들어 간다. 결국 여우는 내 등에 타면 진짜 날아갈 수 있다며 까치를 유혹한다.


여우의 꾐에 넘어가고만 까치는 여우가 신나게 달리자 정말 날아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그때 여우는 까치를 내려트리고는 ‘외로움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너희도 느껴봐!’ 라며 사라진다. “어디선가 함성이 울려 퍼진다. 승리의 소리인지 절망의 소리인지...”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여우의 행동을 해코지로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우를 향한 비난의 눈초리가 이글거린다. 그런데 여우는 왜 개와 까치의 평화를 깨트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까? 그들의 평화에 동참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여우가 서로 다정하게 지내는 개와 까치를 만나지 않았거나 그들과 함께 다정히 지냈다면 어떠했을까? 그들이 여우의 행동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여우의 ‘소외된 타자’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일말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모든 행동의 근원은 복잡하다. 개인을 넘어 가족, 친구, 공동체, 나아가 집단 무의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특히 타인과 비교될 때, 좌절하거나 좌절을 안겨주기 쉽다. 그러기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개인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것은 역부족이다. 지금은 무결점의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에는 언제든 ‘여우’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잠복해 있다. 그렇다면 과연 여우에게 돌을 던질 자 누구인가?


여우가 내지른 함성은 통쾌한 복수를 해낸 승리의 외침일까? 비참한 승리 끝에 터진 절규일까? 과연 여우는 까치와 개의 사이를 갈라놓고, 외로움이 어떤 고통인지 너희도 당해보라며 저주를 퍼붓는 악의 화신인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는 무관심과 집단이기주의 그리고 유혹에 굴복할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있음을 깨닫게 하는 선의 화신인가?


개와 까치가 서로의 눈과 날개가 되어 더불어 사는 모습은 참 평화롭다. 그 평화 공동체에 이방인 여우가 등장할 때, 함께 어우러진다면 그 세상은 더욱 평화롭다. 그러나 그 평화 공동체와 이방인 사이의 장벽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장벽을 유지하는 것이 집단의 평화를 지키는 길이라는 신념이 있는 한, 그 너머의 이방인은 영원한 괴물이 된다.


장벽은 분리와 차별을 낳는다. 이런 장벽의 논리는 국가 사이에서도 반복된다. 장벽은 갈등을 야기하고 급기야는 전쟁도 불사한다. 개와 까치처럼 상부상조하는 우방국 사이에는 장벽이 낮고 유연해서 소통이 가능하지만, 적대국 간의 장벽은 로켓이나 미사일만이 뚫을 수 있다. 최근의 중동전쟁 뉴스를 보며 누군가는 통쾌해하고 누군가는 분노한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역지사지’의 부재에서 시작된다.


승리의 소리인지 절망의 소리인지 모를 어디선가 울려 퍼진 함성은 여우에게 쏟아질 비난의 주파수를 교란시킨다. 악역의 여우와 적응력이 좋은 개, 그리고 심약한 까치 각각의 입장이 되어보자. 비로소 비밀창고에 숨겨놓은 저마다의 아킬레스건이 보이기 시작한다. 작가는 붉은 여우를 악역으로 설정함으로써, '불완전한 존재들의 공존'을 위해 타인을 비난하기에 앞서 그를 이해하고 자신을 돌아보도록 우리를 지혜의 길로 안내한 것이 아닐까. 여우는 어쩌면 우리를 깨우기 위해 악역을 자처한 지혜의 화신일지도 모른다.


여우는 묻고 있다. 당신의 평화는 혹시 누군가의 지독한 소외를 먹고 자란 것은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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