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소설을 읽던 노인이 끝내 울었던 이유

욕망과 공존 사이에서

by hym

‘연애소설 읽는 노인’(루이스 세플베다)이라니. 제목을 듣는 순간, 젊은 날의 연애를 소환하며 삶의 활력을 얻으려는 어느 노인의 주책맞은 회고담을 상상했다. 어떤 연애 이야기인지,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은 어떤 심리인지, 궁금증을 안고 책을 펼쳤다.


아마존 밀림 속 ‘당나귀 배처럼 불룩한 먹장구름’이 등장하는 소설의 첫 문체는 연애소설의 도입치고는 거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서 “~정확히 말하면 세금이 아니고 착취지. 본래 정부란 국민들을 뜯어먹고 사는 개자식들에 의해서 유지되니까~~” 치과의사가 환자와 실랑이를 하며 욕설을 해대는 장면은 나의 상상을 단번에 무너트렸다.


소설은 정부가 말한 ‘약속의 땅’ 엘 이딜리오에 정착하였으나 개간은 언감생심, 말라리아에 걸린 아내마저 잃고 마는 노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의 삶을 비춘다. 노인은 그곳 원주민인 수와르족 인디오들에게서 밀림의 세계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기술과 지혜를 배우며 살아간다.


고독이라는 짐승과 마주할 때마다 그가 찾는 안식처는 치과의사가 가져다주는 '연애소설'이다. ‘연인들이 사랑으로 인해 고통을 겪지만 결국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소설을 읽으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런데 노다지를 캐거나 문명의 이기를 추구하는 인간의 탐욕에 의해 밀림의 평화는 깨진다. 짐승들이 마을주민들을 공격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자, 읍장의 강요에 의해 살쾡이 수색대에 합류한 노인은 결국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어느 쪽도 승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노인은 죽은 짐승의 털을 어루만지며 부끄러움의 눈물을 흘린다. “아마존의 처녀성을 유린하는 모든 이들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연애소설이 있는 오두막을 향하며 막을 내린다.


공장 굴뚝의 매연이 희망의 상징이던 시절이 있었다. 개발과 정복이 정의로 간주되던 시대, 우리는 자연의 비명을 외면했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9월까지 이어지는 폭염과 물에 잠기는 도시들... 생태계를 파괴한 인간에게 되돌아온 자연의 준엄한 경고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 또한 그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오늘날의 우리는 몸소 겪고 있다.


인간의 욕망은 늘 공존의 세상을 무너뜨리는 주범이다. 원주민인 수와르족은 밀림에서 꼭 필요한 만큼만 취하며 자연과 더불어 사는 기술을 터득하여 공존 공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위 문명인은 소유를 위해 파괴를 일삼는다.


작가는 인간답지 못한 동물적 존재를 원시적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의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문명사회에 사는 인간들은 원시림 속에 사는 인간들보다 더 인간다운 것이 무엇이냐고? 또한 남의 것을 폭력으로 강탈하는 것은 원시적 행동이라고들 하는데, 그러면 남의 것을 무력과 권력으로 세련되게 강탈하는 것은 문명적 행동이란 말인가.


현대사회는 모든 것이 넘쳐나는 과잉의 시대이다.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가 과연 행복을 가져다주고 있는가? 오히려 자연파괴뿐 아니라 인간의 평화를 깨트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오히려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덜 가지려 하고, 단순하게 살려는 움직임이 조금씩 생겨난다. 어쩌면 그것은 잃어버린 균형을 되찾으려는 본능적인 몸짓인지도 모른다.


연애소설을 읽던 노인이 끝내 울었던 이유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방식 때문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더 많은 것이 아니라, 더 적은 것으로도 충분했던 세계였다.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자연이 아니라, 욕망을 멈출 줄 아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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