휠리스 HYLLIS 선반
1.
한쪽 벽면을 책으로 가득 채운 집을 꿈꾼 적이 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 손때 묻은 책들이 아름답게 꽂혀 있고, 친구들이 집에 올 때마다 그 앞에 서서 각자 읽은 책들과 함께 좋아하는 책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비록 서가에 대한 나의 로망은 9번의 이사 끝에 사라졌지만 말이다.
이유는 책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책에 대한 나의 애정은 고작 그 정도다.
다년간 나를 관찰해 온 결과 예전만큼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서점에 가는 것과 책을 사는 것은 좋아하지만 목차만 봐도 책을 읽은 거나 다름없다고 주장하며 책을 다 읽지 않고 쌓아두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책을 창가에 두면 직사광선에 책이 빨리 상하니까 로망은 로망인 채로 남겨 두기로 했다.
2.
한때는 책을 사놓고 읽지 않는 나와 이사할 때마다 드는 무거운 책에 대한 반감으로 집에서 책을 없애는 걸 시도한 적이 있다. 실제로 고향으로 이사를 가서 살았던 약 2년간은 집에 책장을 두지 않고 살았다.
엄마의 집에 책을 둘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책장이 없는 집에서 책 없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느냐 하면 그것 역시 힘든 일이었는데,
나는 자꾸만 야금야금 책을 샀다. 새로운 책들은 책장 대신 아파트 현관의 팬트리로 보냈다.
책이 없는 집을 추구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3.
최근 다시 서울로 이사를 올 때에도 내가 사야 할 가구 목록에 책장은 없었다.
곤도 마리에의 조언을 여전히 마음에 새기고 있던 나는 설렘이 남아있는 책 몇 권만을 가져왔다.
그렇지만 내가 망각하고 있었던 것은 내가 여전히 책을 산다는 사실이었다. 야금야금.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이 곧 다시 쌓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제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냥 책을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4.
내가 구매한 휠리스 HYLLIS 선반의 첫인상에 대해 얘기하자면,
와 정말 싸다.(키가 큰 선반 기준 2023년 3월 현재 30,000원, 2017년 당시엔 15,000원이었다.) 근데 뭐가 이렇게 허술해? 정도였다.
실내에 두기엔 마감 상태가 정교하지 않은 데다 곧 휘어버릴 것처럼 가볍고 허약해 보였던 것이다.
이 제품의 용도는 원래 정원관리용 선반인데, 자취생활을 하고 있는 내게는 달리 관리할 정원 같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애초에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살 것도 아니면서 그 허술함만은 늘 못마땅해하며 휠리스 선반이 전시되어 있는 코너를 지나쳤다.
5.
아이러니하게도 책장을 사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휠리스 선반이었다.
당시 나는 가벼워서 이동이 편하고 벽에 고정할 필요도 없고 튼튼하고 멋있으면서도 저렴한 완벽한 책장을 찾는 중이었는데, 휠리스 선반이 가볍고 저렴한 건 확실하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허술함만은 마음에 걸렸는데, 혼자 서 있기도 힘들어 보이는데 물건을 올릴 수는 있는 건지 미심쩍었다.
얼마나 튼튼한지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매장으로 갔지만 매장에 직접 가서 만져보는 것으로는 확인이 어려웠다.
이케아에서는 가구를 벽이나 바닥에 고정해서 전시하기 때문에 휠리스 선반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고, 고정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흔들리지 않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물건을 사러 갈 때마다 휠리스 선반을 만져보았지만 튼튼함에 대한 확신은커녕 마감의 허술함만을 재확인할 뿐이었다.
그냥 샀다.
꽤나 과감해 보이는 이 문장이 쓰이기 위해 서너 번의 매장방문과 여러 번의 망설임이 필요했지만
어쨌든 이번 집의 인테리어에서 시도해 보고 싶었던 얇은 메탈 프레임의 선반을 이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사긴 힘들었기에 마침내 결정을 하고 나자 마음이 가벼웠다.
휠리스 선반에는 세 가지 사이즈가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도 키가 작은 타입으로 선택했다.
키가 큰 선반은 상대적으로 더 허술해 보였고, 쓰러진다면 더욱 위험할 것 같았다.
전동 드라이버가 없었기 때문에 조립이 힘들거라 예상되긴 했지만 포장을 뜯어보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판 자체가 얇은 데다 조금씩 휘어 있었기 때문에 형태가 틀어지지는 않을지 그게 더 걱정이었다.
나사를 살짝 끼운 후 각을 잡아가며 나사를 조였다. 판과 프레임이 틀어지지 않게 잡아줄 사람이 한 명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선반이 완성되자 고정되지 않은 선반을 대차게 흔들어 보았다. 우려했던 만큼 엉성하진 않다는 것에 안도했다.
책을 올려보았다. 책의 무게가 더해지자 안정감이 더욱 커졌다. 드디어 쓰러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6.
휠리스 선반은 보통의 책장과는 달리 책장 벽면이 막혀 있는 구조가 아니어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책을 세워서 꽂으려면 북엔드 등이 필요하다.
나의 경우 책을 꽂지 않고 쌓아두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책장이 따로 없던 이전 집에서도 이런 식으로 책을 정리했는데, 책장에 두기 힘든 책들은 박스에 담아 창고에 넣어두고 자주 꺼내보거나 최근 구입한 것들만 올려두는 식이었다.
책을 쌓아서 정리하고 보니 책의 무게감이 선반의 가벼움을 어느 정도 상쇄해 주었기 때문에 오히려 얇은 뼈대며 스틸마감의 가벼움이 장점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실내에 두기엔 정교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던 만듦새는 반대로 투박한 매력이 있었다. 무심한 듯 시크한 그런 거 말이다.
선반의 아래 두 칸에는 책을, 가장 위에는 스피커나 서랍 속에 두기엔 아까운 소품들을 올려두고 오며 가며 본다.
책을 계속해서 야금야금 사는 나라도 이제는 걱정이 없다.
휠리스 선반이 책의 무게 정도는 버텨줄 만큼 튼튼하다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같은 유닛을 추가로 구입해 확장할 수 있는 벽면이 남아 있고, 무엇보다 이 선반은 저렴하다.
다만 정리된 책장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엄마집 한쪽 방에 쌓아 둔 박스 속 나의 책들에 대해서. 내 집도 아니면서 정리하지 않고 내 물건을 그냥 두고 온 나의 불효에 대해서 말이다.
늘 마음이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