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되어 맞이하는 학급의 특성은 조금씩 다르다. 이번 학급은 첫날부터 웃음기 가득한 얼굴에 교실이 들썩들썩할 정도로 활기찬 분위기이다. 난 이런 아이들이 좋다. 나와 합이 맞는다.
덩치들도 크고 건강함이 묻어나는 아이들이다. 뭐든지 적극적으로 해내려는 열정이 많고 서로서로 돕고 아낄 줄 아는 아이들, 그 귀요미들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중 유독 다른 친구보다는 좀 작지만 단단하게 잘생긴 녀석 H가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평상시 성품은 조용한 편이다. 바깥 활동에선 적극적이고 활동적이어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주변에는 친구들이 늘 모여있다.
그런데 단단하고 작은 키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짐은 무얼까?
한동안 그 녀석을 주시해 보았다. 늘 바른 자세로 맡은 일을 잘하고 친구 관계도 원만하다. 보이지 않는 파워도 갖고 있다. 힘을 부당하게 쓰지는 않는다.
다른 교과목보다 체육에 더 열광하고 하루 종일 해도 부족하다 할 만큼 체육활동에 진심이다. H뿐 아니라 대부분 그렇다.
늘 그러하듯 좀 일찍 출근하여 문을 활짝 열어놓고 커피 한잔 마시며 우리 귀요미들을 맞이한다. 앞문으로 들어오는 귀요미들을 일일이 눈을 맞추며 아침 인사를 한다.
웃고 신나게 들어오는 아이, 시무룩한 아이, 피곤해 보이는 녀석 등등 표정은 매일매일 다르다. 그것도 잠시 서로 이야기하고 장난하며 어느새 교실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진다.
H는 앞문으로 들어와 바로 교실 앞면 작은 게시판에 눈이 먼저 간다. 일일 시간표이다. 아무 말 없이 체육으로 다 바꾸어 걸고 눈을 찡긋하고 멋쩍게 들어간다.
H 모습이 천진난만하고 귀엽기만 하다. 다른 아이들도 바라는 일이라 모두 동조의 눈빛을 보낸다.
난 아무렇지 않게 수업을 시작하면 손을 번쩍 들고 H는 큰 소리로 말한다.
"선생님, 1교시 체육인데요"
갑자기 교실 전체가 시끄러워진다.
'체육, 체육, 체육' 아침부터 교실이 떠내려갈 것 같이 소리를 지른다.
진정시키고 오늘 체육은 3교시인 것 다 알지 않니? 3교시에 한다.
"좀 일찍 하면 안 되나요?" 여기저기서 아우성친다.
그런데 이런 일은 거의 매일 반복된다.
아침마다 H는 시간표를 체육으로 바꾸어 걸고 나머지 귀요미들은 내심 은근히 기다린다. 나는 태연하게 수업을 시작한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아이들의 기대감을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H를 비롯하여 예닐곱 명이 나와서 보챈다.
"선생님, 체육은 언제 하나요?"
심지어 체육 시간이 없는 날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묻는다. 오늘 체육복 입고 온 친구들이 과반수가 넘으니 체육 하자고 조른다. 시간표에 없어도 체육을 입에 올리고 시간을 좀이라도 당겨서 하고 싶은 것을 잘 안다.
귀요미들은 체육 시간에 온 기대를 걸고 등교한다. 체육 시간만큼은 단합이 더 잘 된다.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쉬는 시간도 아껴서 줄 맞춰 서서 준비운동까지 마쳐 놓는다. 체육의 열정에 나는 두 손 들었다.
아이들 얼굴은 벌겋게 익고 땀을 흘려도 즐거움이 담긴 모습에 쉬는 시간도 없이 체육은 이어진다. 끝나는 종이 울린다. 종이 너무 빨리 울렸다며, 고장 난 것 같다며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뛴다.
한 시간만 더하자고 '선생님, 우리 선생님 최고' 하며 갖은 애교를 부린다.
이 아이들에게 최고의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 체육과 관련 주제를 묶어 두 시간을 붙여서 시간표를 짜 놓은 걸 귀요미들은 알까?
'그래, 좋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운동장이 떠내려갈 정도의 함성을 질렀다.
이런 일은 한 달에 한두 번은 있다.
우린 틈만 보이면 체육을 했고 함께 즐거워했다. 심지어 비가 많이 내려 바깥 활동을 할 수 없을 때는(지금은 학교마다 체육관이 있지만) 교실 체육을 했다.
삽시간에 두 팀으로 나누어 책상 배치를 해놓고 깨끗이 정리하고 앉아 있다. 빨리 시작하자고 초롱초롱한 눈들은 나를 재촉하고 있다. 이런 귀요미들의 행동에 따라 주지 않을 교사가 과연 있을까?
앉아서 하는 피구는 집중도 잘되고 긴장감을 준다. 어쩌면 내가 그 상황을 더 즐겼다.
그 해 1년은 체육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행복했다.
지금도 귓가에 '체육, 체육, 체육'이 환청처럼 들린다.
체육의 열정만큼이나 다방면에 여러 재능을 보인 귀요미들,
푸르른 하늘처럼 맑게 사회의 일원으로 생활하며 살아가길 바란다.
시간표를 바꾸던 H를 비롯하여 S초 5학년 모두 보고 싶다.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