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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아 Dec 25. 2024

밴프의 크리스마스 안에서

The spirit of Christmas

Elk, Wolf, Big Horn st.

밴프 다운타운에서 가장 이국적으로 느껴진 건, 아마도 동물이름이 붙은 거리의 표시판일 것이다.

이 동네 사람들은 눈길도 주지 않을 지극히 사소한 것들이지만 나의 일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이 작고 외국적인 요소들에게 애정을 느낀다.


오후의 햇볕이 가장 잘 드는 다운타운의 거리를 계속해서 걸어 다녔다. 걷다가 마주친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에게 가장 편한 옷을 입고 얼굴에는 언제나 가벼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내 인생에 어떤 연결고리도 없는 이름 모를 다수가 우리의 행복 지수를 올려주고 있다는 걸, 그 사람들은 절대 모를 텐데.


걷기라는 단순한 행위와 새로움이라는 단순한 관념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나의 삶에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건 낯선 도시의 여행에만 적용되는 개념은 아닐 것이다.



티끌하나 없는 맑은 공기와 오후의 햇살 아래를 걷다 보니, 매일이 크리스마스라는 상점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좋아할게 뻔하군. 입구 앞에서 가게를 살짝 들여다보니, 온갖 반짝이는 곰돌이, 산타, 루돌프, 거꾸로 매달린 트리들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내가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이유는 아마도 어릴 때 형성된, 여러 기분 좋은 경험들 때문일 것이다.

크리스마스 아침에 눈을 떠보면 발밑에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인형들이 예쁜 포장지에 싸여있었다.


예를 들면 눈을 깜빡일 수 있는 텔레토비의 뽀 (눈을 깜빡일 수 있으면 정품이다), 짱구와 그의 단짝 친구 흰둥이, 미키와 미니마우스와 같이 어린 나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친구들. 이 모두는 루돌프가 끄는 썰매를 타고 온 산타할아버지가 (우리 집엔 없었던 굴뚝을 만들어서 타고 내려와)주신 거였다. 선물과 함께 있었던 편지의 글씨는 엄마 글씨와 좀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6년 전에는 퀘벡에서 라 부티크 드 노엘이라는 곳에 갔었다. 365일 매일이 크리스마스이고 12월 25일 딱 하루 쉬는 크리스마스 상점.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산타가 산타마을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귀여운 이유.


밴프 다운타운에 있는 크리스마스 상점의 이름은

The Sprit of Christmas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음이 녹아내리고 발걸음이 빨라진다. 이런 장소에 다녀온 지 6년이 지났지만 내 안에 아직 크리스마스 심지가 살아있구나,라는 게 느껴졌다. 왠지 아직 나에게도 순수한 마음이 남아있는 것 같아 기쁘다.   


입구에 들어서면 1층을 기준으로 2층과 지하로 연결되는 목조 계단의 구조가 독특하다.

마치 이곳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니 수십 개의 크리스마스 마을 미니어처들이 늘어서 있었다. 디자인, 구성, 콘셉트, 분위기가 단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기억에 남는 미니어처 마을을 잠시 묘사하자면,

Thompson's Furniture라는 가구 상점 앞에서 눈을 치우고 있는 사람(그는 아마도 Thompson일 것이다.), 체스 클럽 앞에서 체스를 두고 있는 사람들(백마 쪽 양반이 턱을 괴고 순서를 기다리는 섬세함이 기가 막히다), 창문에 불이 환하게 켜진 선물 가게까지.


마치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본떠온 것 같은 다채로운 크리스마스의 풍경이 이곳에 온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 같았다. 이 안에서 만난 어른들의 눈빛은 어쩌면 아이들보다도 더 순수에 젖어 있었다. 어디선가는 굳어 있었을 그 눈빛들을 다시 반짝이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곳이다.




성탄절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미니어처들을 보면 어떤 공통적인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건 화려한 크리스마스 파티가 아니라 가장 일상적인 공간 안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따뜻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 여전히 자신의 일을 하고, 평소와 다름없는 소중한 하루를 지내며 마음속의 친절을 조금은 더 내보이는 것.      


크리스마스 아침, 당신을 설레게 하는 건 더 이상 움직이는 눈을 가진 텔레토비의 뽀 인형이 아니라 노라 존스의 캐럴과 약간 쓴 맛의 드립 커피일지도 모른다.

산타가 굴뚝을 타고 내려와 침대 밑에 선물을 두고 갔다는 사실을, 더 이상 믿을 리 없지만 누군가에게 그 순수한 믿음을 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P.S. 눈이 쌓인 크리스마스트리가 올라간 민트색 캠핑카와 블랙 베어 인형을 사 왔습니다. 아주 귀여워요.

Have yourself a Merry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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