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시작과 과정에 대하여
키칠라노는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와 거의 일치했다. 이곳은 푸른 나무가 가득한 산책로를 가로지르면, 무엇이든 내어줄 것 같은 늦은 여름의 해변이 나오는 곳이다.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도통 호기심이 없다. 그들은 이 동네에서 태어나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이 아름다운 해변과 함께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키칠라노 해변에서 가까운 카페에 들러 뜨거운 블랙커피를 주문했다. 카운터에는 달콤한 딸기가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와 크루아상이 가득 차있고 내부는 이미 부지런한 동네 사람들로 만석이다.
유행을 따르고 있지 않은 동네 카페는 어딘가 사랑스러운 느낌이 있다. 소셜미디어 같은 곳에서는 크게 눈에 띄지 않는 곳일 것이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곳이 우리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와 크루아상을 파는 곳이라는 것을.
룰루레몬의 스웻 라이프가 시작된 곳
키칠라노 해변을 눈앞에 두고 벤치에 앉으니 저 멀리 동네 사람들이 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키칠라노는 세계적으로 애슬레저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룰루레몬의 시초가 된 지역이다.
이 브랜드는 낮에는 디자인 스튜디오, 밤에는 요가 스튜디오로 운영되는 키칠라노 웨스트 4번가의 작은 건물에서 시작되었다.
룰루레몬은 땀 흘리고(sweat), 성장하며(grow), 관계를 맺는(connect) '스웻 라이프'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있다. 이른 아침, 함께 모여 요가를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니, 과연 룰루레몬의 발자취가 그대로 담긴 동네라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은 전 세계적으로 4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하며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한 브랜드가 되었지만,
26년 전 키칠라노에서의 시작에 대해서 생각해 봤다. 그들이 밤에 운영했던 요가 스튜디오는 룰루레몬 성공에 가장 강력한 기반이 된 커뮤니티 마케팅의 토대가 되었다.
개인에게는 멀게 느껴질 수 있는 글로벌 브랜드의 히스토리는 뜬금없게도 어떤 생각을 끌어올리기도 한다.
남들의 너무 많은 성공을 본다. 성공이라고 정의된 단면만을 본다. 보이는 건, 그것뿐인 줄 알면서도 그들은 쉽게 성공한 것 같다. 모든 것이 잘 갖춰진 환경에서 타고난 재능을 가지고, 눈부신 성과에 눈물은 없을 것 같다. 결과는 쉽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생각은 물 흐르듯 자신의 상황과 마주한다. 그러자 내가 실패라고 정의한 것들의 존재감이 커져있었다. 아직도 난 여기야. 비교는 곧 질투라는 감정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스스로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어느새 나의 노력은 사소하고 하찮은 게 되어버린다. 그 노력은 의미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의미가 없기에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어느새 늪을 만들어 냈다.
사실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자신에게.
우리는 예쁘게 보이는, 딸기 케이크가 전시된 디스플레이 앞에 서있을 뿐이다. 그 케이크 한 조각에 필요한 누군가의 수많은 시간, 쌓인 노력, 정성, 뜬눈으로 지새운 불안한 밤, 셀 수 없는 실패, 아무도 없는 순간의 고독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그저 먹을 뿐.
다시, 키칠라노 웨스트 4번가의 작은 건물을 생각해 본다.
노력이라는 가치가 평가절하되는 세상에서 과정이 결여된 성취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들의 성공이 자신의 실패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알고 있던 성공과 실패라는 이분법적 정의를 다시 조정할 수도 있다.
무용해 보였던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당신의 시간은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내는 근원이 된다. 자신의 과정을 사랑하게 된다. 이것만큼 멋진 내적 성취는 없을 것이다.
알랭드보통은 부러움과 감탄은 결실을 맺기 위한 탐사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두 개의 신호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부러움을 오래 붙잡아둔다면, 부정하거나 그에 이끌려 절망에 빠지는 대신 차분히 음미한다면, 우리는 그 깊은 지옥으로부터 어떻게 우리 자신이 될지에 관한 중요한 단서들을 얼마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 존 암스트롱 저자(글) · 김한영 번역 · 문학동네 · 2019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낸 늪을 통해 오히려 더 건설적인 자신이 되어갈 수 있다. 그렇게 믿는다.
키칠라노의 분위기는 다운타운의 복잡함과는 무관했다. 단지 다리 하나를 건너왔는데 이렇게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는 사실이 이 동네를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인일 것이다. 함께 모여 땀 흘리는 동네 사람들의 모습도 보기 좋았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도 눈길이 가는 건 마찬가지다.
혼자 걷고, 뛰고,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다가, 사유의 바다를 헤엄치는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쩌면 쌓인 걱정과 근심을 바다에 흘러 보내려 왔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스웻 라이프의 모습을 간직하면서 키칠라노를 떠났다.
P.S. 유행을 따르고 있지 않은, 사랑스러운 느낌의 카페 이름은 VIVA cafe & bakery입니다. 뜨거운 블랙커피의 맛이 훌륭합니다.
VIVA Cafe & Bakery
1555 Yew St, Vancouver, BC V6K 3E5 Can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