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일곱 개 언덕 중 가장 높은 곳
"하나뿐인 창문을 열자 처마에 고인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여전히 들려왔다. 아직도 비 그친 후의 축축하고 시원한 공기가 느껴졌다. 하늘은 완전히 파랗게 물들었고 이미 힘을 잃었거나 지친 비가 남겨놓은 구름들은 하늘에게 마땅히 누려야 할 길을 '성채' 뒤쪽으로 물러갔다."
페르난두 페소아가 <불안의 서>에서 말한 '성채'는 리스본의 '상 조르제 성'을 의미한다. 도시의 일곱 개 언덕 중 가장 상징적인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시작은 기원전 1세기경 고대 로마시대였다.
상 조르제 성에 오르려면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동네인 알파마를 거쳐가야 한다.
알파마(Alfama)라는 이름은 아랍어인 'al-hammah'에서 유래했는데 북아프리카의 무어인들이 8세기 경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을 때 이곳에 정착하며 남긴 지명이다. 좁고 미로 같은 골목 구조는 그 당시 중세 이슬람식 도시 계획의 전형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혼돈 속의 질서와 패턴. 오르락내리락 가파른 언덕길을 걷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울퉁불퉁한 돌바닥, 유연하게 휘어져있는 급커브의 골목길, 오래된 건물과 철제 난간, 그 위에 널려 펄럭이는 빨래들, 상인들의 목소리, 좁은 입구 안으로 보이는 동네 술집들. 자동차와 100년 된 트램까지.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것 같지만 그 안에서 지켜지고 있는 일련의 규칙 같은 것들이 도시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성 입구 매표소의 그 사람은 티켓을 발부하며 무던한 얼굴로 내게 묻는다.
어디서 왔어?
한국에서 왔어(왜 물어보지?)
대답과 동시에 왜 물어보냐는 물음이 떠오른 이유는 그의 진지한 표정 때문이었다.
곧이어 그는 우리에게 표를 건네주며 말한다.
갬사합니다!
내가 느낀 리스본 사람들은 보통 이런 식이었다. 과하지 않은 친절을 넌지시 건네는 식이다. 따지자면 싱긋싱긋 웃는 얼굴상은 아니지만 시크해 보이는 표정 안에 다정함이 담겨있다.
리스본을 상징하는 색상이 있다면 누구나 노란색이라고 말할 것이다. 대지진 이후 도시 재건 시기에 노란색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건 후대의 상징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그 해석이 맞다면 당시 선조들의 색상 선택은 탁월한 것이 아니었을까. 사람들에게서 노란색의 따뜻한 온기가 그대로 전해진다.
기원전 로마 시대부터 요새로 사용된 이곳은 8세기 무어인들이 성곽을 정비하면서 지금과 비슷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알파마와 마찬가지로, 성벽 역시 이슬람 도시 계획의 흔적을 간직한 채 리스본의 중세 풍경을 남기고 있었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는 포르투갈 왕가의 왕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후 왕궁이 테주강가로 옮겨가면서 성은 다시 군사 요새의 기능을 되찾았다. 포르투갈이 독립하기 전부터 존재해온 상 조르제 성은 천 년이 넘는 도시의 시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 했다.
성에 오르니 저 멀리 테주 강이 보였다. 자동차, 전보, 전축이나 라디오 같은 도시 문명이 리스본에 물밀듯이 흘러들어오며 자연적인 것의 의미가 바뀌기 시작했을 때, 페소아는 여기 테주 강에서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
"이런 물건들에 흥미도 없거니와 갖고 싶지도 않다. 대신 나는 테주 강을 좋아하는데, 그 옆에 큰 도시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하늘을 좋아하는데, 도심에 자리 잡은 거리의 사 층 방에서 바라보는 하늘이라서 좋아한다.
테주 강은 리스본 서쪽에서 대서양으로 유입되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긴 강이다. 리스본이 세계 최초의 해양 제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러한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탐험가들이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한 곳이며 금, 후추, 설탕, 보석 등 식민지에서 실어온 물자들은 모두 테주 강으로 도착했다.
성에서 내려와 알파마를 거쳐 다시 테주강변까지 걸어 내려왔다. 금은보석보다 더 귀한 모습을 스쳐 지나간다. 강이 대서양이 되어가는 모습을 품에 끼고 걷다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아름다움을 눈에 담아둔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페소아가 테주강에 대해 말한 부분을 서둘러 펼쳐본다.
"나의 크기는 내가 보는 것들의 크기. 온 정신을 집중해서 이 문장을 떠올릴 때마다 별들이 수 놓인 우주를 재구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글 같다."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