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마다 우습고 귀여운 것들
요즘은 아침마다 무릎에 연고를 바르고 있다. 고양이의 날카로운 발톱에 할퀸 양 일자로 주욱 부풀어있는 선홍빛 자국을 보면서 생각한다. 왜 꼭 해야 할 말은 필요한 때 나오지 않는 걸까.
오랜만에 버스를 탄 날. 비어있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아 멍하니 창 밖을 보니, 여름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동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나가면 참 덥겠구나. 정류장을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버스는 점점 더 무거워지고 옆자리는 어느새 누군가로 채워진다. 목적지에 다와가 버튼을 누르고 내리려는 시늉을 하자니, 몸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돌리고 가방을 추슬러 매고 의자에서 일어날 기세. 옆에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친다.
앉아있던 버스의 좌석 간의 간격은 유난히 좁았고 그 좁다란 틈에 차량의 구조상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둥그런 턱이 있었다. 원피스라는 애니메이션에 주인공 루피가 고무고무!라고 외치면 팔이 얇게 주욱-자유자재로 늘어나는 장면이 있다. 그러니까 루피의 고무고무 팔처럼 다리가 얇게 주욱 늘어나서 옆 사람의 무릎을 전혀 건들지 않고 넘어서서는, 바닥에 발이 닿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장면이 있다.
이쯤 되면 자리에서 무릎을 살짝 통로 쪽으로 돌려주는 것이 사람들이 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의 세상은 그렇게 보이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되는 질서 같은 것에 의지하여 돌아간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요지부동의 그 사람을 보면서 그렇지 않은 세상도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다. 음악을 듣고 있지도 않았고 옴짝달싹하는 나를 보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너무 정확하게 눈이 마주쳤으니까.
'버스 문이 닫히기 전에 빨리 나가야 해'와 '이렇게 사소하게 당혹스러운 건 처음이야'와 같은 생각이 겹쳐서 '내릴게요'와 같은 짧은 한마디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하여간 당황스러움을 느껴도 해야 할 말을 삐그덕 대지 않고 할 수 있는 그런 야무짐은 언제 생겨나는 것일까. 이럴 땐, 지나치게 모든 걸 조심스럽게 대하는 내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필터가 많아도 너무 많다.
그렇게 생겨난 무릎의 상처는 일주일이 넘도록 없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 사람의 움직이지 않는 무릎을 피해 루피의 고무고무 팔처럼 다리를 뻗다가 정체 모를 그 턱과 정면으로 인사한 것이다. 딱딱한 것에 잘못 부딪혔을 때, 딱! 하고 느껴지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짧고 강렬한 고통은 익숙해질 리가 없다. 후-하고 날숨을 쉬며 성급히 내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그 순간이 몸의 열을 올렸다.
그렇지만 감정이라는 것이 쉽게 구겨지기도 하다가 놀랍게도 사소한 것에 스르르 펴지기도 하는 법. 언짢은 기분을 안고 버스에서 내리니 희한한 게 보인다. 어떤 사람이 검은색 바탕에 붕어빵 열댓 마리가 그려진 양산을 들고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붕어 한 마리는 누군가 깨물어 먹어서 속을 가득 채운 팥이 슬쩍 고개를 내밀고 있는데 참 저런 참신한 양산을 누가 만들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거리에 귀여운 것들이 많이 보인다. 모두가 '우리 꼭 검은 옷만 입고 다니자'하고 약속이라도 한 듯 드레스 코드는 한결같이 무채색이지만 그들의 검은 가방에 달랑거리는 키링만큼은 예외다. '나 이런 거 좋아해요!'하고 외치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그 작은 인형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키링만큼은 반드시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
가방 끝에 달린 키링들은 주인의 취향과 개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스치듯 즐거움을 주는 어렵기만 한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정작 나는 전혀 달고 다니지 않지만 거리의 무해한 귀여움의 혜택을 받으며 오늘도 기분을 스스로 조정하는 법을 배워간다.
어떤 하잘것없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고 일말의 다정스러움도 느끼지 못한다면 일상이 얼마나 사막 같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서운한 일에 헤헤 거리며 어리둥절하게 넘어가자는 것은 아니지만. 기분이나 감정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 무슨 큰 힘이 주어진 것 같다. 그것만으로도 나를 둘러싼 환경은 반전될 수 있고 오늘 하루 만들어갈 이야기는 달라진다.
사실은 꽤 많은 일들이 그렇게 우습고 평범한 것에게 가려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생각해 보면 외롭고 쓸쓸하고 억울한 것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